산수유꽃 / 안숙
꽁꽁 얼었던 강물이 풀리고 백여 년 만의 혹한을 이겨 낸 나뭇가지에 새싹이 돋는다. 제주에서 시작해 남도를 따라 뭍으로 오른 꽃소식. 매화 마을에 매화가 피고 산수유 마을에 산수유가 피면 섬진강은 봄빛으로 푸르리라.
나는 산수유꽃을 좋아한다. 잔설이 성성한 이른 봄 연약한 가지에 잎보다 먼저 꽃눈을 틔우는 강인함이 좋고, 한약재에 쓰이는 가을 빨간 열매를 좋아한다. 길어야 꽃잎은 4,5mm 잘디잘다. 오이씨같이 작아도 산수유는 작은 고추가 맵듯이 몫을 다하는 유익한 꽃이다.
사람들이 기호품이 변하듯 좋아하는 꽃도 나이 따라 변하는 것 같다.
어렸을 적엔 오월의 산과 들에 무더기로 피는 향긋한 아카시꽃을 좋아했다. 자잘한 안개꽃도 좋고, 우리나라에서는 백두산에만 핀다는 솜다리꽃도 좋아했다. 생각해 보니 내가 좋아한 아카시꽃, 안개꽃, 솜다리꽃은 모두 흰색이다.
일상을 벗어나고 싶으면 혼자 밤기차를 타고 대구에 가서 팔공산에 있는 갓바위에 오르곤 했다. 한밤중에 갓바위 부처님께 정성을 들이고 오면 심신이 맑아지듯 그리 평온할 수 없었다. 십여 년을 넘게 매달 한 번씩 그곳을 오르내렸다.
희끗희끗 눈이 남은 가파른 하산길. 산 그림자가 짙은 골짜기에 희부연 동이 트는 새벽, 함초롬히 피어 있는 노란 산수유꽃이 어찌나 아름답고 신선하던지. 꽃잎에 지나가는 싸한 바람 소리는, 마른 풀잎처럼 주저앉을 것 같은 내 외로운 발걸음을 가볍게 했다. 그렇게 십여 년 새벽 산을 오르내리는 동안 산수유는 내가 좋아하는 꽃이 되었다.
지금 우리 집 베란다 화분에 산수유 한 그루가 심어져 있다. 남편이 부실한 몸으로 심은 것이다. 언제부터인가 남편은 내가 좋아하는 것을 말없이 챙겨주려 애썼다. 못다 한 마음을 보여 주는 것 같아 가슴이 아파 온다. 아직은 묘목이지만 꽃이 피기를 기다리며 정성으로 물을 준다.
유리창에 햇살이 부신다. 아직 꽃샘바람이 차지만 창밖은 살아 있는 모든 생명들이 일어나는 봄이다.
‘버들은 푸르고 꽃은 붉다柳綠花紅.’
생동하는 봄 정경에 놀란 소동파의 시구다. 개나리, 진달래, 목련, 벚꽃, 복사꽃이 한꺼번에 피는 울긋불긋 꽃대궐에 놀라지 않을 사람 어디 있으랴.
우울했던 긴 겨울 털어버리고 노란 산수유 활짝 피는 새봄을 맞으리라. 앉아서 기다릴 게 아니라 늦기 전에 가슴 가득 찬란한 새봄을 맞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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