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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세상/좋은수필 2

[좋은수필]삼강 주막 / 안숙

삼강 주막 / 안숙

 

 

 

끝이란 기억의 망각점이기도 하다. 지난 삶의 자취가 새 것에 밀려 사라지는 것을 사람들은 그리움으로 바라본다. 묻히는 것이 소중한 역사의 끝자락이면 더 엄숙한 무상감에 젖게 된다.

삼강이 흐르는, ‘삼강 주막’ 이 있는 곳이 동네는 다르지만 같은 면(面)에 속하는 내 고향이다.

조선시대 마지막 남은 주막이 옛 모습을 되찾는다는 반가운 소식이 들렸다. 경북 예천군 풍양면 삼강리에 위치한 삼강은 예천읍을 에돌아 나오는 내성천과 금천, 낙동강이 합류해서 생긴 지명이다. 주막은 1900년대쯤 자연스레 삼강나루터에 들어섰다고 한다.

일제 때만 해도 삼강나루는 물자와 사람이 분주하게 오가던 교통 요지였다. 경남과 부산에서 올라온 소금배, 쌀을 실은 미곡선들이 모이던 이곳에서 상인들의 물물교환이 이루어졌다.

그리고 서울로 올라가는 소장수, 보부상들과 물자로 북적거렸다. 5일장이 서는 날이면 하루에 30여 차례씩 나룻배가 이쪽저쪽을 오갔다. 한창 붐볐을 때는 소 6마리나 실을 수 있는 큰 배와 작은 배 두 척이 오갔다고 한다.

70년대 제방이 생기고 인근에 다리가 놓여 소금배와 상인이 끊어졌고, 다른 교통이 발달하면서 자연스레 나룻배도 끊겼다. 차로 이동이 가능할 무렵까지 나룻배는 이 지역의 중요한 교통수단이었다.

강을 경계로 걸려 있는 풍양면과 용궁면에 서는 5일장 마당에 다른 곳보다 시장 규모가 크고 소판이 번성했음이 내 기억에 남아 있다.

주로 장마당을 오가는 상인들이 다니던 길이었지만 내게도 오래전 삼강나루에서 배를 타고 이 강을 왕복했던 소중한 기억이 있다. 어린 시절 이 강을 건너던 기억은 참으로 애틋한 추억으로 남았다.

주막은 일자집에 방 둘, 부엌 하나, 툇마루가 전부지만 안방에 시렁이 걸쳐 있는 영락없는 옛 봉놋방이었다. 외딴 나루터, 나그네에게 꼭 필요한 자리에 있었다. 보부상과 길손들이 쉬어 가는 휴식처이고 잠자리였다.

지금까지 남아 있는 것은 마지막 주모 유옥연 할머니 덕인지 모른다. 20대부터 70여 년간 이곳에서 살다가 90세에 세상을 떠난 할머니. 일찍이 남편과 사별하고 5남매를 키워 출가시킨 후에도 거동이 불편할 때까지 혼자 길손을 맞았다.

고달픈 사람들이 고향처럼 쉴 수 있었던 곳, 허기를 채우고 주모가 따라주는 막걸리 한 잔에 시름을 다래며 쉬어가던, 팍팍한 요즘 생활에 비하면 얼마나 여유롭고 낭만적이던가 싶다. 이제는 유유히 떠 있는 나룻배와 나루터. 장마당이 서는 동네 입구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주막은 어디에도 없다. 현대판 휴게소가 대신한다.

내가 초등학교를 졸업하던 그 해는 군단위로 수험생을 한곳에 모아 중학교 입학시험을 치게 했다. 나는 풍양초등생이었다. 시험장소인 용궁초등학교까지는 걸어서 재를 넘고 삼강을 건너야 하는 30리 길이었다. 여자는 나 혼자, 어머니가 밤새워 만들어 주신 흰 세일러복을 입고 시험을 보러 갔다.

픙양면 3개 초등학교 졸업반 남자 백여 명에 섞여 배를 타고 강을 건넜다. 용궁에 도착해 담임선생이 빌려 준 방에서 잠을 자고 다음날 시험을 쳤다. 여름이었지만 남자아이들은 용궁초등학교 운동장에 멍석을 깔고 한뎃잠을 자고 시험 보던 걸 생각하면 그런 시절도 있었구나 싶어 콧등이 시큰하고 마음이 애잔해지곤 한다.

한꺼번에 배를 타지는 못했을 터, 물을 마시며 주막에서 쉬던 그 옛날이 아련해진다.

용궁에 시댁 본가가 있다. 누가 알았겠는가. 내가 용궁으로 출가할 줄을. 시댁에 갔다가 불현듯 삼강나루가 보고 싶어 부랴부랴 택시를 불러 타고 간 적이 있었다. 주막은 방문마다 자물통이 채워져 있고 주모 할머니는 서울 ‘부뚜리’ 딸집에 가고 없었다. 기사가 들려준 딸 이름이 나루터에 어울린다는 생각을 하며 아쉽게 돌아선 기억이 선하다.

이제는 주모도 떠나고, 마당에 있던 세 그루 회화나무 고목만이 지난 풍상을 말해 주는 듯싶다.

2005년 풍양과 용궁을 잇는 삼강교가 개통되었다. 오랜 세월 산과 강이 가로막아 30리 길이 천리보다 멀 만큼 단절되었던, 두 지역은 두메는 아닐지라도 참으로 외진 곳이었다. 절벽처럼 가로막던 삼강재에 길을 닦아 지금은 승용차가 씽씽 달린다. 내가 입학시험 치기 위해 강을 건넌 후 반세기 넘은 세월이 흐른 것이다.

고향에는 역사적 관광지가 많이 남아 있다.

삼강리는 조선시대 하회 유성룡 대감과 쌍벽을 이뤘던 약표 정탁 대감의 고향이기도 하다. 요즘 뉴스에서 뜨고 있는 용궁면 회룡포가 하회마을 못지않은 태극 문양으로 휘돌아 흐른다. 중학교 3학년 1학기 국어교과서 속표지 그림이 된지도 오래되었다. 지명 표시가 없어서 그동안 아깝게 묻혀 있었다.

용궁향교, 시댁 마을인 용궁 무이서당, 역사적 자료 가치와 지난 시대상을 읽는 문화적 의미로도 충분한 볼거리가 많다.

주막이 복원되어 관광객의 발길이 닿는 것은 좋으나 옛 정서를 훼손하지 말았으면 한다. 세상에 변하지 않는 것은 없다지만 우리가 잃어가는 것, 주변에서 사라지는 모든 것이 아쉽다. 마지막 삼강 주막은 서민들의 삶의 자취를 잃어가는 것이기 때문에 더 아쉬움을 남긴다.

고향이라는 말에는 눈물이 고여 있다. 순수하고 따뜻하고 간절하다. 도시 삶의 햇수에 비례할 만큼 그리워지는 것 같다.

내 마음 속 삼강에는 시간이 멈춰 버린 강이 흐른다. 아직도 부모님 생전 모습이 어른거리고 흰 세일러복 초등학생이 나룻배를 타고 나풀거리고 있다. 그때 배를 타고 함께 강을 건넜던 악동들은 지금 어떤 모습으로 나이를 먹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