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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세상/좋은수필 2

[좋은수필]수줍음 / 유두영

수줍음 / 유두영

 

 

연전에 있었던 일이다. 고종누이가 아들 결혼식에 주례를 청탁하기로 승낙을 했더니, 그 날 새 옷을 입고 해 달라면서 양복을 맞추어 주겠다는 것이었다. 나는 극력 사양했지만, 굳이 그러겠다는 그의 고집을 꺾지 못하고 그를 따라 어느 양복점으로 들어섰다.

 

더 늙기 전에 밝은 색으로 지어 입으라면서 누이가 직접 감을 골라주는데, 그건 내게는 어울리지 않는 너무도 화려한 색상이었다. 하지만 제 돈 내서 해주겠다는 성의를 거절하기가 어려워 그대로 따르는 도리밖에 없었다.

 

결혼식 날 예식장에 가기 위해 처음으로 입은 새 양복은 청색 계통인데 이삼십대 젊은이나 입을 그런 빛깔이었다. 그렇지만 그 날만은 그 옷을 입지 않을 수가 없지 않은가. 거리에 나서서도 스치는 사람마다 쳐다보며 비웃는 것 같아 고개를 숙이고 걸었고, 주례사를 하는 동안에도 하객들이 내 말을 듣는 것이 아니라, 모두 내가 입고 있는 양복의 색상에만 시선이 모이는 것 같아 얼굴을 붉히었다.

 

마지못해 하루만 입고는 깊숙이 간직해 두리라고 마음먹었다. 그래서 다음날 아침에 입던 옷으로 갈아입으려고 하는데 아내가 가로 막으면서, 어제 예식장에서 보니 참으로 보기에 좋더라는 것이다. 그러면서 더 늦기 전에 입지 않고 두었다가 호호 노인이 되어서 입으려느냐는 것이다.

 

나는 생각해 보았다. 거리에서 모든 사람이 비웃었을 것이라고 여긴 것은 나 혼자만의 생각이요, 실상 누구 하나 나를 거들떠보는 사람이 없었다. 예식장의 하객들도 주례사를 듣기 위해 주례의 얼굴을 쳐다본 것이었을 뿐, 주례의 옷에 관심을 가졌을 사람은 없다. 내가 그 옷을 입고 당황했던 것은 결국 나의 타고난 수줍음에서 온 것에 불과한 것이었다.

 

나는 어려서부터 남달리 수줍음을 많이 탔다. 설날 아침이면 새로 지은 설빔을 입고는 까닭 없이 부끄러워져서, 동네 어른들께 세배를 드리러 가기는 해야겠는데 선뜻 대문 밖으로 나가지를 못했다. 그러다가 우리 할아버지께 세배 드리러 온 같은 또래들과 어울려서야 함께 나가곤 했다.

 

그때 우리 동네에서는 학교에 양복을 입고 다니는 아이들이 없었다. 이웃 동네 아이들도 마찬가지였다. 관공서에 근무하는 아버지를 둔 아이들이나 더러 양복을 입었을 뿐이었다. 그런데 어느 때엔가 뜻밖에도 구식으로만 살아오던 아버지께서 내게 학생복을 사다 주셨다. 나는 안 입겠다고 버티다가 꾸중을 듣고 나서야 입기는 했으나, 학교에 갈 때에도 학교에 가서도 부끄러워서 고개를 숙이고 다녔다. 선생님께서 좋다면서 만져주셨고 다른 아이들이 부러워하기까지 했건만, 나의 그러한 수줍음의 상태는 꽤 여러 날이 걸린 것 같다.

 

수줍음이 겨우 사라질 때쯤에 아버지는 양복에 고무신이 어울리지 않는다면서 학생화인 목구두를 사 오셨다. 그때도 나는 양복을 처음 입었을 때처럼 부끄러워서 많은 고역을 치렀음은 물론이다.

 

나는 소년 시절에 동네 어른들께 인사를 잘 안 한다는 말을 많이 들었다. 그런 소리가 들릴 때마다 집안 어른들께 꾸중을 들었고, 그럴 때마다 나는 억울했다. 나는 동네 어른을 뵈면 꼭 인사를 드렸건만 수줍음으로 해서 오해를 받아온 것이다. 나는 어른 앞에 버티고 서서 또랑또랑하게 인사를 드릴 용기가 없었다. 당돌한 짓 같아서였다. 그래서 고개를 숙이고 비켜서서 입속으로만 어물어물 인사말을 하니, 인사 받는 분은 그것을 인사로 여기지 않고, 고개를 돌리고 못 본 체 비켜가는 것으로 오인했던 것이다.

 

그러다가 세월이 흐르고 세태가 변해감에 따라 양복에 구두를 신고 지냈으며, 그러는 동안에 내 성격도 많이 닦여나서 어른들을 뵈면 상대방이 알아들을 수 있도록 인사를 드릴 수가 있게 되었다. 그러나 천성인 수줍음이 내게서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내 직장생활의 첫 출발은 중·고등학교의 교사였다. 모 학교에 취직을 하는데, 연구수업을 거처야 한다는 것이었다. 교실 뒤편에는 교장을 비롯한 교직원들이 둘러앉아서 나의 수업 태도를 지켜보는 것이었다. 나는 눈앞이 캄캄해졌다. 가슴의 고동소리만 들릴 뿐, 내 목소리가 내 귀에는 통 들리지 않았다. 하마터면 하던 수업을 중단하고 교단에서 내려서고 말 뻔했다. 하지만 수업은 그런대로 괜찮았던지 합격은 되었다.

 

이렇게 시작한 교편생활을 계속해 초로初老의 나이로 접어들었을 때, 친구가 찾아와서 아들 결혼식에 주례를 서 달라는 것이었다.

 

나는 그것을 사양했다. 오랜 세월 나이 어린 학생들 앞에서는 말을 많이 해 왔지만, 많은 일반인 앞에서 연설해 본 일이 없었으니 수줍음을 많이 타는 내가 그것을 감당해 낼 자신이 없었던 까닭이었다. 그리고 그 이야기는 그것으로 끝난 것으로 알고 있었다.

 

친구네 경사를 축하하기 위해 나가는데 난데없는 차가 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다. 그것은 주례인 나를 모시러 온 차였다. 친구는 나의 거절이 그저 해 보는 인사치레의 사양으로만 알았던 모양이다. 청천벽력과 같은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이제 한 시간쯤 뒤에는 예식이 있을 판이니 다시 거절할 수도 없게 되었다. 야무지게 매듭을 지어 거절하지 못한 것을 후회하면서 차에 앉아 주례사를 꾸며보았다. 그러나 막상 주례석에 서서는 차 속에서 꾸며 온 말이 온데간데없어지고 말았다. 참으로 난처한 십여 분간이었다.

 

친구 덕분에 홍역을 치른 뒤로는 아는 이들의 아들딸 결혼식 주례를 더러 맡아왔고, 그러는 동안에 많은 사람 앞에서 말하는 솜씨도 어느 정도 익숙해졌지만, 또 한 번 대중 앞에서 수줍음으로 해서 당황한 일이 있다. 그것은 주례사 아닌 축사에서였다. 어느 의식에 참석했을 때, 사회자가 축사의 순이라면서 나를 호명하는 것이었다. 이름이 발표되었으니 안 나설 수도 없어 준비도 없는 축사를 하느라고 진땀을 뺐다.

 

 

며칠 전에 지운 스님에게서, 새로 절을 창건하고 낙성식 겸 점안식點眼式을 봉행하는데 참석해 달라는 초청장이 날아왔다. 그래서 몇몇 법우와 함께 참석했다. 법당에는 많은 고승 대덕大德이 도열해 있고, 수많은 신도들이 법당이 모자라 넓은 절 마당에까지 운집해 있었다. 스님이 축사를 부탁한다.

 

그러나 나는 승낙할 용기가 없었다. 그 많은 대덕 스님들 앞에서 불교에 조예도 깊지 못한 내가 어떻게 입을 놀릴 수 있겠는가 하는 수줍음 때문이었다. 장엄한 의식이 거의 끝날 무렵, 사회자가 시간 관계로 축사를 생략한다면서 아쉬워한다. 나는 그 모습을 보고 그만 나의 수줍음을 또 한 번 꾸짖었다. 귀로의 차 속에서도 후회가 끊이지 않았다. 나의 수줍음은 언제나 사라질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