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리 날다 / 이언주
나는 미운오리새끼였다. 새끼 오리들 가운데 성격이 순한 나는 몸만 컸지 행동이 느렸다. 벌레를 보고 잡으려 해도 누군가 잽싸게 낚아채거나 빼앗겼다. 잿빛의 길쭉한 목에 뒤뚱거리는 걸음도 언제나 웃음거리였다. 내가 부끄럽다고 형제들은 나를 밀어 냈다. 동네아이들은 굼뜨고 못생긴 나와 아무도 놀아주지 않았고 나를 화풀이 대상 정도로 밖에 생각하지 않았다. 그런 나를 이웃들은 혹시 칠면조 새끼가 아닌지 모르겠다고 들 수군거렸다.
몸피가 자라는 것보다 따돌림으로 마음속에서 슬픔이 웃자랐다. 내 이야기에는 아무도 귀를 기울여 주지 않았다. 영문도 모른 채 목덜미를 물리기도 하고 풀숲에 곤두박질쳐졌다. 고양이에게 쫓겨도 아무도 나를 도와주지 않았다. 어쩌면 나는 정말 오리가 아닐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오리가 아닌 나는 무엇일지 상상을 하는 것이 오히려 혼자만의 아픔을 잊게 하는 유일한 행복이었다. 하루는 덩치 큰 칠면조가 되어 나를 괴롭히던 친구들을 혼을 내기도 하고, 어떤 날은 기러기가 되어 어디론가 훨훨 날아가기도 했다.
햇볕이 따뜻한 오후 풀이 죽어 고개를 늘어뜨리고 있다가 덤불 속에서 잠이 들었다. 저 멀리 땅 끝까지 너른 풀밭이 펼쳐져 있었다. 잘게 부서져 내리는 햇살. 반짝이는 물결 위를 유유히 떠다니는 깃털이 눈부시게 하얀 오리들이 보인다. 꿈속에서 나는 백조가 되어 오리들 사이에서 푸른 물결을 박차고 하늘로 날아올랐다. 너무나 생생한 꿈이었다. 두려웠지만 어디엔가 있을 나만의 세상을 향해 울타리를 뛰어 넘었다.
유난히도 추운 겨울이 지났다. 봄이 되면서 몸이 커지고 기운도 세졌다. 자신감도 생기고 어디선가 희망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것도 같았다. 지난 해 텃새를 심하게 부리던 오리들도 더 이상 괴롭히지 않고 멀찌감치 떨어져 무리지어 다녔다. 어느 날 가까이 있던 백조 한 마리가 다가와 부리로 날개를 쓰다듬어 주었다. 세상에서 처음으로 받아보는 친절은 말 할 수 없이 행복했다. 아름다운 백조와 함께 유영을 하는 이 순간이 꿈이라면 영원히 깨어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물속에 비치는 내 모습은 나날이 백조를 닮아가고 있었다. 그러나 마음 한구석에서는 잊고 싶었던 어린 시절이 자꾸만 아프게 되살아났다. 이유 없는 공격을 피하기 위해 긴장하던 습관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구박받고 무시당하며 따돌림 받던 아픈 기억 때문에 자신도 모르게 주위 눈치를 살피고 있었다. 당당하려 애쓰는 마음 이면에 자리 잡고 있는 두려움과 비겁함이 보이지 않는 곳으로 숨어들어 자랐다. 그들 앞에서면 위축되어 안으로 자꾸만 작아져 갔다. 마음속에 살고 있는 미운오리새끼는 달아나려 할수록 더 세차게 발목을 잡아당기고 있었다. 백조로 태어나서 자란 친구들은 알지 못하는 슬픔 이었다.
그들과 가까워질수록 ‘나는 누구인가’ 하는 문제를 떨쳐버릴 수가 없었다. 풍요의 신과 빈곤의 여신 사이에서 태어난 에로스처럼 풍요를 갈구하는 마음은,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채워지지 않는 빈곤에 목말라 하고 있었다. 점점 변해가는 자신을 바라보며 내가 누구인지를 알아내기 위해 자신에게로 집중해 보지만 아무것도 알아 낼 수가 없다. 오히려 백조의 모습으로 변해가는 미운오리새끼였던 자신이 혼란스럽기만 하였다. 나도 백조이고 싶다. 오리도 백조도 아닌 슬픔의 심연은 어디에 있는가.
어느 날 아침, 갑자기 움츠리고 있던 날개 죽지가 근질거려 왔다. 처음 느끼는 감정은 언제나 두려움으로 다가왔다. 공포의 전율이 느껴졌다. 주체할 수 없이 자꾸만 날개가 퍼덕거리고 있었다. 알 수 없는 떨림으로 날개 짓을 하는 순간, 몸이 저절로 떠올랐다. 꿈에서처럼 다리와 목을 길게 뻗고 너울너울 날개 짓을 하자 몸이 가벼워지고, 날아오르고 있었다. 저 아래로 커다란 숲과 그 한가운데 깊은 호수가 보인다. 세상이 눈부시게 아름답다. 언젠가 꿈에서 보았던 것처럼 초록빛 능선이 멀리 펼쳐져 있고, 투명한 호수에는 물결이 보석처럼 반짝인다. 기쁨에 가슴이 터질 것만 같다.
거울 같은 수면은 눈부시게 아름다운 백조 한 마리를 비추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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