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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세상/좋은수필 2

[좋은수필]놓친 물고기 / 노덕경

놓친 물고기 / 노덕경

 

 

 

동창회 체육대회 때였다. 어릴 적에 뛰놀던 운동장에서 옛 찬구들과 소주잔을 기울이며 학창 시절의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데, 이곳저곳에서 “오빠” 하고 부르는 소리가 들린다. “야! 얼마만이야? 그 동안 별일 없었느냐?” 대답을 하면서허도 내 눈은 그녀들을 살폈다.

해마다 광복절에 초등학교 동창회를 연다. 나는 동기동창을 만나는 일도 좋지만 무엇보다 한마을에서 함께 자란 그녀가 행여 올해는 오려나 기대하면서 동창회에 참석해 왔다.

고등학교 시절에는 주로 빵집이나 영화관에서 ‘미팅’ 이 많았다. 삼류 극장에서 두세 개 영화를 동시에 상영하던 시절, 우연히 극장 앞에서 그녀를 만났다. 서로가 싫어하지 않으면서 좋아한다는 소리도 못하고 서로 이 사람 저 사람 친구 만남을 주선하면서 만나다 보니 서로 정이 들었다. 사춘기에는 누구나 사랑의 열병을 앓는다. 헤어지면 보고 싶고 밤마다 꿈속에서 환한 미소로 다가오는 그녀의 모습 때문에 공부를 할 수 없었다. 그녀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직장에 나갔고, 나는 대학에 진학했다.

우리는 주말이면 할 일 없이 근교에 나가 붙어 다니는 것을 좋아했다. 겨울에는 강가를 거닐며 몸과 턱을 사시나무 같이 떨면서도 붙어있었고, 저녁이면 헤어지기 싫어 동이 틀 때까지 서로 바래다주곤 했다.

늦은 봄 철쭉 구경 가자며 합천에 있는 가야산에 간 적이 있었다. 가야산 남산의 기암절벽과 철쭉꽃을 보고, 홍류동 계곡의 솔바람도 만끽하자며 토요일 시외버스에 몸을 실었다. 제 2의 금강산이라는 매화산에서 젊은 남녀가 손을 잡고 지난날의 이야기, 문학 이야기, 부푼 꿈의 이야기로 시간 가는 줄 몰랐다. 그날만큼은 시간이 정지했으면 하고 바랐다. 가슴이 두근거리고, 딴 곳에 정신이 팔려서 하산길에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는 바람에 발목이 삐끗했다. 마지막 버스를 놓치기만 한다면 무슨 일이 될 것만 같아 그녀에게 부축해 달라며 더욱더 천천히 내려와 결국 막차를 놓쳤다.

어떻게 삼류 여관 방을 얻어, 앉아서 밤을 새우기로 약속하고, 이불과 베개로 삼팔선을 만들었다. 처음에는 친절한 오빠가 되어 안정을 찾도록 도와주었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차차 감언이설과 유인 작전으로 포병과 전차를 동원하여 전진했다. 그렇게 삼팔선을 넌다가 팔로 밀고, 발로 차고, 꼬집고, 밤이 새도록 치열한 전투를 했지만 그녀의 고지를 점령하지 못하고 영원히 잊을 수 없는 패전을 기록하게 되었다.

이젠 강산이 세 번이나 변하고도 몇 해의 세월이 흘러 그때의 일들이 옛 사진첩 속의 흑백 사진처럼 빛이 바랬다. 그렇게 잊혀 가고 있는 그녀지만 때때로 나의 마음 은밀한 곳에는 동굴의 종유석처럼 그리움이 자랐다.

그때의 추억이 순수하고 진실된 것이라 해도, 이미 그녀는 다른 남자와 결혼하여 가정을 이루고 이이들의 어머니로 살아가는 것처럼, 진솔한 삶을 영위하며 많은 사물과 만남 속에 희로애락(喜怒哀樂)을 느끼는 것이 인생사다.

나는 동창회 체육대회 때마다 아름다운 소년, 소녀 적의 추억을 이야기할 즐거운 해후를 기대하며 사람들 사이를 살핀다. 운동장을 한 바퀴 돌면서 그녀의 동기가 있는 천막을 찾아갔으나 보이지 않는다.

낚시꾼이 아쉬울 때는 다 잡은 물고기를 놓칠 때라고 한다. 놓친 물고기는 두 뼘이 되고 틀림없이 월척이라고 생각한다. 그녀도 나처럼 첫사랑의 감미로움을 아직도 간직하고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