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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세상/좋은수필 2

[좋은수필]수박의 소리 / 소진기

수박의 소리 / 소진기   

 

 

 

누가 나에게 ‘가장 맛있는 과일이 무엇이오?’ 하고 묻는다면 주저 없이 이렇게 답하고 싶다.  

‘익을 대로 익어 더 견디지 못하고 쩌억 갈라진 수박이 바로 그것이오.’  

어린 시절, 무서움을 감내할 만한 나이가 되었을 무렵 원두막에서 수박밭을 지키는 임무가 나에게 주어지곤 하였다. 가끔씩 인기척을 내라는 선친의 엄명에 주기적으로 전등을 상하좌우로 비추고 흔들며 한여름 밤을 새우곤 했는데, 모든 감각기관이 귀에 집중되어 있는지라 거기서 듣는 풀벌레소리의 어우러짐은 들어 본 사람만이 알 수 있는 대악(大樂)이었다.  

뜨거운 여름의 열기가 어둠 속으로 빨려 들어가고 선선한 공기가 살갗을 보송보송하게 할 때쯤이면 저 멀리 마을의 불빛이 하나 둘씩 사라지는 것을 보게 된다. 그 장면이 그림이라면 나는 제법 오랜 시간을 애잔한 마음으로 명화를 감상한 것이다.  

뒷집의 불도 꺼지고 우리 집도 꺼지고 최후에 남은 어느 집의 불빛마저 꺼지면 칠흑의 밤 속에 별빛들은 더욱 찬란하게 빛났다. 이제 자연의 소리도 잦아들 때쯤 여름 햇볕에 익을 대로 익어 가다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쩌-억’ 갈라지는 수박의 소리!  

인생이란 게 뭔지 전혀 몰랐던 소년의 가슴에도 왠지 그 소리는 내가 들었던 어느 판소리보다 구성지고 어떤 곡조보다도 가슴에 와 닿았으니 그것도 생명의 끝이라고 느꼈기 때문일까?  

미명의 아침, 그 놈을 따다 보면 그 갈라짐이, 그 결이 얼마나 자연스러운지 또 한 번 감탄을 하게 된다. 밤새 찬이슬로 냉장된 그 놈의 가장 부드러운 속살을 퍼서 한입을 물면 달콤하고도 차가운 기운이 몸 전체로 퍼지며 잠자는 세포를 깨운다. 입 안엔 달콤한 첫 키스의 여운 같은 것이 남는다. 온몸이 감전된다고 해야 옳은 표현에 가까울 것이다.  

나는 요즘도 수박을 보면 풍요로움과 정겨움을 느낀다. 시장으로 팔려 나간 수박은 다시 돈이 되어 돌아와 내 학비가 되었으니 그렇지 않으랴!  

경험상 수박은 클수록 맛있다는 것이 내 지론이지만 아내는 큰 수박을 싫어한다. 냉장고에 넣을 자리가 없다는 이유에서다. 참 합당한 이유이지만 냉장고야 내 소관이 아니므로 나는 여름만 되면 큰 수박을 사 들고 집에 들어가기를 즐긴다. 솜털이 달린 손톱만한 열매가 큰 수박으로 자라기까지의 과정을 눈으로 직접 보고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수박 맛에서 원두막의 운치까지 느낀 셈이니 수박에 관한 한 최고의 호사를 누린 셈이다.  

그래서 어느 날 ‘원두막’이란 제목으로 이런 시를 썼었다.  

 

팔월은 뜨거웠다  

응달이 귀했으므로  

고명 같은 바람이  

흐뭇한 그늘로 불어올 때는  

거기엔  

원두막 언저리엔  

뜨거워  

속으로 뜨거워  

몇 날을 익어 와  

허연 엉덩이를 드러낸  

아, 기다림!  

하룻밤을 이기지 못하고  

쩌-억  

갈라져 버린 자멸(自滅).  

 

제대로 성숙되고 익은 수박은 줄기를 단 그 기다림을, 그 인내를, 그 속내를 마지막 단 한 번 보여 주는 것이고 단 한 번 소리 하는 것이리라.  

말 많은 것들과 설익은 것들이 설쳐대는 세상이다. 세상의 말없는 것들에 위대함이, 조용히 익어 가는 것들에 삼라만상의 질서가 있음을 안다. 생명줄기를 잡고 있는 내 인생이 그러했을까! 내 사랑이 그러했을까! 아직은 소리 없이 조용히 익어 갈 뿐이다.  

막막한 기다림은 팔월의 햇볕처럼 아직도 내겐 뜨겁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