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수필세상/좋은수필 2

[좋은수필]내 앞의 문 / 성냑향

내 앞의 문 / 성냑향

 

 

 

손이 비트는 방향으로 노상 순하게 돌아가던 문고리였다. 내 의지대로 열리고 닫히던 문이었다. 당연히 그럴 거라고 여겼던 문고리가 난데없이 저항했을 때, 마치 그것으로부터 격렬하게 거부당하는 느낌이 들었다. 문의 완강한 저항, 나를 가로막는 단단한 저항이 손끝으로부터 온 몸에 전해졌을 때, 내가 그동안 이 문을 장악하고 살았다 여겼던 게 실은 착각이었음을 깨달았다. 문을 온전히 소유한 건 내가 아니라 열쇠였다.

일요일 오후, 여행 가방을 옆에 던져두고서 나는 계단에 쪼그리고 앉아있다. 잠긴 문을 열고 집에 들어갈 수 없어서다. 그는 외출 중이다. 집을 비우고 나간 그에게 수없이 전화를 해도 받지 않는다. 화가 치밀어 오른다. 물론 이런 상황에 처한 데는 내 책임도 있다. 일정보다 일찍 서둘러 귀가한 책임. 현관문 열쇠를 챙겨 나오지 않았던 책임. 그러나 나의 분노는 편파적이다. 내 잘못보다는 전화를 받지 않는 그를 향해서만 일방적으로 끓어오른다. 가방 속의 책을 꺼내 무릎 위에 펼쳐보지만 산란한 머릿속으로 활자는 들어오지 않는다. 내 시선은 자꾸 문으로 가 꽂힌다. 그가 돌아올 때까지 지루한 대치를 이어가야할 저 문에게로.

일상이 어긋날 때면 종종 뜻하지 않은 것들이 삶속으로 뛰어드는 법이다. 오늘 내 앞에 느닷없이 버티고 선 문이 바로 그런 것이다. 저 문을 이처럼 오래 응시한 적이 있었던가. 매일, 하루에도 몇 번 번씩 드나들던 문이었으나 이렇게 가만히 앉아서 바라보는 문은 낯설다. 늘상 문 뒤의 세상에 뛰어들기 급급하여 한 번이라도 제대로 문을 바라보지 못한 때문이다.

치통을 느낄 때 비로소 이빨을 환기하게 되는 것처럼, 제 등 뒤의 안락의자와 물 한잔을 향한 내 욕망을 저지당하는 이 불편한 순간에 이르러서야 저 문, 문이란 존재로 직시하게 된다. 그래, 지금 이 시간만큼은 문 하나가 내 세계의 전부다.

저 문은 내가 만난 몇 번째 문일까.

살아오는 동안 수 없이 많은 문을 만났다. 각양각색의 문들, 내 인생은 어쩌면 그것들을 하나씩 열고 닫으며 지나오는 과정이었는지 모른다. 어린 시절 자주 가서 놀던 작은 교회당의 낡은 대문. 늦은 밤 지물포의 문에 끼워지던 페인트로 굵게 숫자가 쓰인 양철덧문들. 혼자 힘으로 열기 버겁던 외가의 육중한 나무대문. 안채의 세 살문들, 겨울이면 부옇게 김이 서리던 뙤창이 달린 철물점 가계방문. 지각한 날 간발의 차이로 닫히고 만 학교정문. 저마다 하나의 세상을 숨기고 있던 문들.

따뜻한 기억으로 남아있는 문과 그저 바라보기만 하고 들어가지 않았던 문도 많았다. 오늘처럼 나를 막아서 문들도 있었다. 수술실 문은 생각만으로도 마음이 시리다. 머리에 비닐 캡을 쓴 남편, 캡 때문인지 이상하게 낯선 얼굴의 그가 침상에 실려 수술실로 들어가자마자 문이 닫혔다. 어느 때보다 함께이고 싶은 시간에 서로를 떼어놓고 마는 문 앞에서, 자신의 운명을 타인의 손에 맡긴 남편만큼이나 나도 외로웠다. 그리고…, 공항의 출국장 문도 그랬다. 먼 이국으로 떠나는 아들 녀석이 출국장으로 들어가고 그 이이 등 뒤에서 문이 닫혔을 때, 한동안 그 자리에 꼼짝 않고 서서 나는 또 다른 여행객에 의해 그 문이 열리기를 기다리며 넬리섹의 말을 떠올렸었다.

“문이란 칼과 같죠. 세계를 두 개로 자르니까요.”

문은 벽의 연장이다. 이동식 벽이다. 그러니 문의 속성은 개방보다는 폐쇄에 있다. 닫혀있을 때 견고하게 저항하는 문이 좋은 문이다. 문의 뒤편에 있을 때는 잘 잠긴 문의 등짝을 늘 믿음직하게 여기지 않았는가. 나는 좀 전까지 원리원칙에서 벗어나지 않는 문의 강직함에 분노했었다. 저에게 부여된 역할과 책임을 다하는 문에게 ‘내가 누군 줄 알고 가로막느냐?’며 패악을 부렸다. 우스운 일이다. 문은 어떤 고귀한 분이나 악한의 방문을 받았을 때도 지금처럼 팔짱을 낀 채 요지부동이었을 것이다. 이 세상 단 하나의 열쇠에게만 반응하도록 문을 길들여 놓은 것은 나였다. 열쇠가 올 때까지 다른 무엇에도 한 눈 팔지 않는 충직한 자세를 지켜보면서, 문의 미덕에 잠시 분개했던 나를 탓한다. 그런데, 저 문을 다스릴 열쇠는 대체 언제 도착하는가.

차가운 계단에 쪼그리고 앉아 있으니 임응식의 사진 ‘전쟁고아’가 생각난다. 그 사진 속의 고아도 폐허의 어딘가에 지금의 나처럼 쪼그리고 앉아있었다. 넝마에 맨발, 온몸에 때가 새카맣던 소년이었다. 다섯 살쯤 됐을까? 이마에 주름이 잡히도록 눈을 잔뜩 치떠 카메라 렌즈를 바라보던 아이의 눈초리가 떠오른다. 난리통에 혼자된 그 아이에겐 사방이 온통 잠긴 문이었을 것이다.

어머니를 잃어버린 순간, 아이에게는 세계로 통하는 문이 닫혀버린다. 애초에 어머니는 모든 인간에게 문이었다. 어머니라는 문을 열고서라야 세상에 나올 수 있다. 내 배 가운데에도 붉고 기다란 문 하나가 있다. 임시로 만들었다가 지금은 폐쇄된 문. 그 문을 열고 아이 둘이 세상에 나왔다. 출산의 순간이 아니라도 어머니는 자식에게 늘 열린 문이다. 떠나온 곳을 향해서나, 돌아갈 곳을 행해서나.

어머니를 잃어버리면 생의 비밀의 문 하나가 영영 닫혀버린다. 고아 소년의 치뜬 눈이 무언가를 간절히 찾고 있다는 걸 난 알 수 있었다. 아니는 문을 찾고 있었다. 세상 어느 편에선가 또 다른 문 하나가 열리기를 고대하고 있었다. 자신의 틈입을 허락하는 문. 자신을 그 영문 모를 잔혹한 고립으로부터 벗어나게 해 줄 어딘가의 열린 문을.

이윽고, 복도 창으로 석양빛이 스며든다. 그는 지금 어디에 있는가. 어떤 문들을 지나다니고 있는가. 어쩌면 그도 나처럼 문 하나를 열지 못해서 집으로 오는 시간이 이리 더뎌지고 있는 것인가. 그를 향한 분노는 조금씩 사그라 들고 걱정과 조바심이 섶을 타고들 듯 내 마음결에 옮겨 붙는다.

그러나 때가 되면 나는 금색으로 도장한 저 철문을 열고 집으로 들어갈 것이다. 그리고 내일도, 모레도, 생의 끝 날까지 계속해서 닫힌 문들을 열고 지나갈 것이다. 어쩌면 생과 사의 접점을 통과할 때마저도.

죽음에 이른 뒤에라야 문은 소용없는 것이 될 터. 흙으로 봉분을 쌓아올리거나, 석관을 덮은 묘지, 유택의 어디에서도 문을 본 기억은 없다.

문 앞을 서성이다가 전화기를 꺼내 그를 다시 호출한다. 아니, 저 문의 열쇠를 호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