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는 것에 대한 분노 / 권남희
나는 좀 아둔한 편이다. 대체로 이해관계를 따지는 일에 서툴다. 때문에 적극적으로 나서서 스스로를 위해 변명하거나 이익을 챙기는 일은 더 둔하다. 그리고 큰 손해 없으면 어지간한 일은 참고 견디면서 그냥 넘겨 버린다. 참는 일에 익숙해서인지 불평을 하거나 대드는 쪽보다 참는 게 더 편했다.
어려서부터 부모님이나 주변 사람들에게 ‘맏이인 네가 참아라.’라는 다독거림을 많이 들었다.
언제나 ‘네가 누나니까 동생에게 양보해라, 참는 사람에게 복이 온단다, 악한 끝은 없어도 참고 착하게 지내면 좋은 끝을 본단다.’ ‘참을 인(忍)자 셋이면 살인을 면한다’ 등 잘 참는 사람이 좋은 사람 대접을 받는 것처럼 세뇌를 받은 편이다. 참는 일이 진정 어떤 것인지도 모르면서 참기만 하면 좋은 일이 내게 벌어지려니 믿었다.
참으라는 말을 귀가 아프게 들었던 경우는 아버지와 어머니가 부부싸움을 할 때였다. 말귀를 알아들을 무렵 나는 ‘참는 게 무엇일까’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왜냐하면 아버지, 어머니가 부부싸움을 시작하면 옆집, 앞집 아주머니 아저씨들이 달려와서 아저씨는 아버지를 붙들고 무조건 참으라며 무마시키느라 애를 쓰고 아주머니는 어머니를 부엌으로 데리고 가서 여자니까 무조건 참으라며 달래고 다독거렸다. 동네 어른들이 모두 입이 닳도록 했던 말이 ‘그저 참아야 한다’는 몇 마디였다.
그런 소동을 겪을 때마다 나는 참는 일이 무얼까 의아해 하며 생각에 빠졌다. 참는 일은 굉장히 두렵고 어려운 그 무엇, 도달하기 어려운 대상으로 느껴졌다.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니까 아버지, 어머니 동네 사람들이 저렇게 매달려 쩔쩔매는 것이겠지 판단하며 ‘참는 것’에 경이감을 가졌다. 부모님이 부부싸움을 벌일 적마다 나는 속으로 다짐을 하곤 했다. 나는 꼭 참는 일을 잘 해내서 저렇게 온 동네를 발칵 뒤집어 놓지는 않을 거야.
언제부터인가 내 귀에 익숙해진 칭찬은 거의 ‘애가 참을성이 강하다’라는 말뿐이었다. 그것은 마치 닳아 빠진 책상 모서리처럼 나는 점점 잘 참아내는 일에 대해 긍지를 가지게 되었다.
결혼을 해서도 나는 당연히 참을성의 대가처럼 나를 내세우기보다 순종하고 견뎌내는 일에 진면목을 보였다. 차남인 남편이 여러 가지 이유로 부모님을 모셔야 했을 때도 묵묵히 따랐다. 집안 대소사를 혼자 거뜬히 해낸다든지, 질투심 많은 시누이가 퍼뜨리는 험담과 부당한 언사에도 참는 게 대수인 양 말을 삼키고 있을 뿐이었다. 어떤 대응을 한다든가, 항변을 하고 이치를 따지는 일은 엄두를 못 냈다. 시부모님도 ‘여유가 있고 더 배운 네가 참아라’ 이런 당부를 수시로 하며 내 참을성을 칭찬했다. 친정어머니도 ‘배운 여자일수록 네가 참고 잘 처신해야 한다’며 참을성의 덕목을 앞세웠다.
그렇게 참아내는 일에 길들여진 내가 어느 날인가 아이의 친구들을 놀러 오지 못하게 막는 시아버지에게 강한 어조로 나의 의견을 내세우는 사건이 일어났다. 상당히 이유 있는 제안인데도 그 일은 집안을 시끄럽게 하고 말았다. 시아버지는 앓아 누운 채 아들을 불렀고 가족들은 내 태도를 문제 삼았다. ‘실망했다’ ‘교양 있는 사람은 그러면 안 된다’ ‘다른 사람 모두 함부로 행동해도 너만은 그러지 않을 줄 알았다’ 등 비난 섞은 윽박지름에 곤욕을 겪고 할 수 없이 무릎을 꿇고 말았다.
그들은 부모에게 대들고 때로 칼부림을 해도 충분히 그럴 수 있다고 이해받는 사람들이었고 나는 무슨 일이든 참고 견뎌야 하는 대상이었다. 그러나 아이러니컬하게도 이런 나를 남편이 지겨워하기 시작했다. 분명하게 의사표현을 하지 않고 우물거리는 나를 못마땅하게 생각했다. 나도 내 자신이 싫어졌지만 무언가 보이지 않는 억압 속에서 하루아침에 자신을 바꾼다는 일이 쉽지 않았다. 참기만하고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 일이 상대를 얼마나 숨막히게 만들고 있었던가.
내게 슬슬 형체도 없는 분노가 일기 시작하면서 ‘나는 바보였을까’ 그런 피해의식까지 생겨났다. 친구들과 비교하면서 나는 참고 침묵하며 자기 할 일만 하는 사람보다 자기 표현을 지혜롭게 하면서 당당하게 사는 친구가 낫다는 결론을 내리기도 했다.
이제는 사회가 달라졌다. 어디에서건 누군가를 붙들고 참으라고 곁에서 달래는 사람을 보기가 힘들어졌다. 다만 곳곳에서 큰 목소리로 자기가 옳다는 주장을 하며 소리지르는 광경만 눈에 띈다.
자동차가 질주하는 대로에서 자동차끼리 접촉사고가 나면 사람들은 먼저 우기고 고함지를 태세부터 갖추고 자동차에서 내린다. 참고 조용히 무마하려는 사람들은 극히 드물다. 신세대들은 더욱 참고 견디는 것을 무능하다고 생각한다. 어디가 부족하니까, 자신이 없거나 겁나니까 당하고만 있지, 이렇게 여긴다.
참는 자의 덕이 사라져 버렸다. 참는 자에 대한 가치 기준이 달라졌다. 잘 참아내는 것에 대한 분노만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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