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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세상/좋은수필 2

[좋은수필]도토리묵 / 최해남

도토리묵 / 최해남

 

 

국립공원에 있는 참나무의 도토리를 사람들이 모두 주워 버려 청설모의 먹이가 없어져 큰일이라는 언론 보도를 접했다. 이놈은 다람쥐와 달리 먹이를 굴을 파서 저장하지 않고, 주위에 군데군데 숨겨 놓는 습성이 있다고 한다. 주위에 숨겨 놓은 것을 사람이 가져가 버리니 청설모 입장에서는 도둑을 맞은 것과 다름이 없다. 참나무가 번식되어 가는 것도 이 청설모라는 놈이 숨겨 둔 양식을 잃어버려 그곳에서 싹이 돋아나기 때문이라고 한다. 자연은 이렇듯 순리로 답을 풀어 나간다. 억지가 없고, 자기 자신이 열심히 살아가는 것으로 운행이 연속되어지는 것이다. 만물의 영장이라고 하는 사람이 이래서야 되겠는가. 어린 동물의 먹이를 훔쳐서야 될 법인가 말이다.

예전에는 먹을 것이 없어서 이 도토리를 주워다가 끼니를 때우곤 했다. 흉년이 들면 참나무에 열매가 많이 달린다고 한다. 아마도 산중의 작은 동물들의 먹이 외에도 가난한 서민들의 끼니까지 걱정해 주심이 아닌가. 보이지 않는 곳에서도 서로를 위하는 마음이 녹아 나는 자연의 깊은 가슴이라 하겠다.

어린 시절 어머니를 따라 도토리를 주우러 갔을 때이다. 어머니는 “야야, 한 나무에 있는 것 다 따면 안 된데이.”라는 당부 말씀을 잊지 않으셨다. 나는 영문을 모르고 그저 시키는 대로 도토리를 따 모았지만 세월이 지나고 나니 그 깊은 뜻을 헤아릴 것 같다. 서로를 존중하는 것이 삶의 근원이고, 더불어 살아가는 자연의 순리라는 것을.

파란 하늘에 어울리게 고운 단풍이 물들면 나는 창문을 열고 물끄러미 바깥을 내다보는 병이 도진다. 일종의 향수병일 수도 있고, 가을처럼 지고 있는 인생에 대한 허무 같은 것이 깔려 있지 않나 싶다. 까닭 모를 외로움이 어쩌면 인간의 본모습일지도 모른다. 어차피 홀로 와서 홀로 떠나는 것이 아닌가. 나의 이런 병이 보일 성싶으면 집사람의 신속한 처방이 나오기 마련이다. ‘이열치열(以熱治熱)’이듯 향수병(鄕愁病)에는 향수(鄕愁)를 느껴 보게 하는 것 외에는 다른 처방이 없는 법. 저녁에 퇴근해 오자마자 식탁 위에 도토리묵이 한 상 차려져 있는 게 아닌가. 얼른 ‘묵채’부터 해치우고 묵무침과 ‘통묵’으로 젓가락 놀림이 바빠진다. 이런 모습을 바라보는 내자의 표정은 마냥 즐겁기만 하다. 어린아이처럼 헤헤 벌어진 나의 모습이 우습지 않고서야, 은혼(銀婚)이 넘도록 티격태격 살아온 우리지만 지나고 보면 늘 내자가 한 수 위인 듯싶다. 도토리를 먹고 자란 세대. 지난 시절의 아름다운 슬픔의 흔적이 이슬방울 매달린 도토리 열매처럼 굴러온다.

굴밤을 떨어뜨려 주는 참나무 앞에 서면 절로 고개가 숙여진다. 화강암의 척박한 땅에서 뿌리를 내려 주는 참을성에서. 산에 들어서면 졸참나무며, 떡갈나무, 상수리나무 할 것 없이 큰 잎을 흔들며 맞이해 주는 밝은 인사성에서, 봄날 연두색 넓은 잎과 줄기는 무논에 뿌려져 거름으로 쓰이고, 작은 짐승에서부터 곤충에 이르기까지 겨울을 나는 먹이가 되어 주는 남을 위한 희생정신에서. 어디 그뿐이랴, 썩은 나뭇등걸에도 유익한 균사를 붙여 표고버섯을 자라게 하지 않는가. 자신밖에 모르는 사람들이 내뱉는 오염을 생각하면 고맙고, 숭고하고, 겸허하다는 생각이 든다.

도토리와 가난한 농촌의 살림과는 떼어내려야 떼어낼 수 없는 밀접한 관계에 있었다. 도토리는 굴밤이라 하여 껍질을 벗기고, 삶아 몇 날 며칠 동안 우려내어 보리쌀 몇 톨과 섞어 밥을 지으면 대가족의 끼니를 때울 수 있었다. 맛으로 먹는 것이 아니다. 살기 위해 먹는 것이고 보면 여기에는 풋풋한 인정과 사람의 향기가 묻어난다. 나는 이 ‘굴밤밥’ 을 먹을 때면 팥밥으로 여겼다. 팥 삶은 색깔과 닮았기도 했지만 마음속에 이렇게 설정을 해 놓으면 그 나름대로 멋이 있는 것 아니냐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가난한 아이들의 간식은 이 굴밤에다 사카린을 넣고 절구에 찧어 떡같이 만들어 뭉쳐 먹는 ‘느티’ 라는 음식을 빼놓을 수 없었다. 추운 겨울날 어쩌다 시골 논길을 따라 걸을 때면 논 가운데 있는 작은 우물 옆에 굴밤을 우려내던 장독을 그려 보곤 한다.

어린 시절, 감이 빨갛게 익어 가는 무렵이면 우리 집 마당에는 묽은 고추는 보이지 않고, 크고 작은 도토리들이 촘촘히 멍석을 깔고 앉았다. 작은 밭에는 그저 양식 될 만한 것만 심어야 했기 때문에 양념에 불과한 고추는 뒷전일 수밖에 없었다. 가을은 참 양반인 것 같다. 고운 햇살로 곡식과 과일을 익게 하고, 맑은 하늘과 알맞게 부는 바람으로 추수한 수확물의 간수를 도와 준다. 멍석 위로 바람이 지나가는 모습을 보면 절로 웃음이 나온다. 빨간 도토리의 엉덩이를 뒤지는가 하면 고추잠자리의 꼬리를 깨물기도 한다. 도토리란 놈은 영양가가 많아서 이런 장난질이 없ㅎ으면 아내 벌레가 먹고 만다. 겨울을 기다리며 영문도 모른 채 햇살ㅇ르 맞아들이는 도토리를 보면 고마운 생각이 든다. ‘저마저 없었으면 가난한 농촌 사람들이 어떻게 겨울을 났을꼬?’

내가 중학교 다니던 어느 해 겨울이다. 학교를 파하고 어둡살이 낄 무렵 집 안으로 들어서는데 어머니가 보이지 않았다. 책가방을 방에 던져 놓고 엄마를 부르다가 정지문(부엌문의 사투리)을 열었다. 깜깜한 부엌에서 어머니가 눈물을 훔치고 있지 않으신가. 그 옆으로 장에 팔러 가신다던 묵 판에 묵이 그대로 놓여 있었다. 우리 집은 행정권은 경주시지만 울산하고 붙어 있는 곳이라 뭐라도 팔 것이 있으면 ‘울산장’ 을 이용하곤 했다. 나는 왜 묵을 그대로 가져오셨을까 하는 의문이 풀리지 않아 “어머니, 왜 묵을 그대로 가지고 오셨어요?” 하고 묻지 않을 수 없었다.

“묵이 새카매 가지고 아무도 안 사더라.”

아픈 어머니의 마음도 모르고, 우르르 묵 판을 둘러싸고 허겁지겁 묵을 퍼먹던 동생들. 나는 어머니를 위로해 드린답시고 “바보같이 진짜 묵도 모르고…….” 하며, 흥분을 했지만 조그만 눈물방울을 숨길 수 없었다. 지금도 눈을 감으면, 학비라도 보태 보려고 온 산천을 다 누비며 도토리를 따 모르시던 어머니의 모습이 눈에 어련히 비쳐 온다. 어머니의 다리를 주물러 드리다가 마주치는 가시덤불에 긁힌 상처투성이. 우리 어머니는 훈장보다 더 값진 사랑의 등불을 우리에게 가슴으로 남겨 주신 것 같다.

요즈음 도토리가 몸에 잔류되어 있는 화학 물질을 없애 준다는 보도 덕에 도토리묵이 인가가 높다. 영면하시지 않았으면 우리 어미니, 이 산천 저 산비탈 훨훨 날아다니실 텐데…….

도토리묵에서 우러나는 어머니의 향기가 그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