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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세상/좋은수필 2

[좋은수필]그들은 무거워서 어떻게 사는가 / 박헬레나

그들은 무거워서 어떻게 사는가 / 박헬레나

 

 

오래 살던 집을 팔았다. 이곳에서 노년을 보내고 생을 마감하신 시어른 두 분과 장년에 이른 세 아이들, 21세기 초에 태어난 손자손녀까지 합치면 4대의 숨결이 머물렀던 집이다. 꿈과 욕망으로 얼룩진, 내 생의 가운데 토막이 오롯이 담긴 곳이기도 하다. 삼십여 년의 세월을 등 돌리고 돌아서는데 어찌 회한이 없겠는가만 연(緣)이란 언젠가는 끝이 있게 마련 아닌가.

옮겨 앉을 집을 보러 갔더니 강바람이 거칠게 불어와 나를 떠메고 갈 태세다. 바람! 반갑다. 신천을 끼고 있는 곳에 도시인들의 보편적인 주거공간인 아파트를 한 채 구입했다. 한 보름 발품을 판 끝에 얻은 소득이다.

곧추세운 토끼장 같은 건물에 들락거릴 생각을 하니 썩 마음이 내키지 않으나 이제 편리함을 염두에 두지 않을 수 없다. 하늘과 강, 가로수와 파란 둔덕이 조화를 이룬 신천의 경관이 빌딩의 삭막함을 어느 정도 상쇄할 것 같아 여기에 점을 찍었다. 강 건너 도시 중심가의 우뚝우뚝한 건물들 너머로 멀리 동구의 아파트들이 보이고 그 위로 팔공산 능선이 순한 짐승처럼 엎디어 있다. 오늘 같이 바람이 숨죽인 날엔 단풍든 가로수가 물에 잠겨 한 풍경을 이룬다.

많은 의무로부터 벗어난 지금 나는 이곳에서 바람과 야합할 꿈을 꾼다. 바람이 실어오는 낯선 이야기에 귀 기울이고 내 이야기도 들려주며 그만이 지닌 무한자유를 마음껏 탐닉해 볼 작정이다. 건들 부는 바람, 그것이 이곳을 내 거처로 선택한 첫 번째 이유다.

가벼워지라고 한다. 그것이 바람과 친구할 천 번째 조건이란다. 딴엔 비우고 또 비웠다. “네가 가지고 있는 것을 다 버리고 모든 속박에서 자신을 해방하라”고 쓴 에리히 프롬의 글귀가 나를 채근한다. 가벼워지고 싶고 벗어나고 싶으나 몸 감출 집과 배를 채울 밥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는 것이 인간의 한계다.

사물의 무게를 느끼는 것은 어디까지나 주관적이다. 천금을 지고도 허기를 느끼는 사람이 있는가하면 어쭙잖은 집 한 채도 무거운 사람이 있다. 꼭 어느 것만 옳다고 할 수 있는가. 혼란스럽다. 욕망이 발전의 근원이란 걸 이해하면서 작은 가슴이 자랑이 아니란 것도 알았다. 욕망이 커야 포부도 크고 큰 인물이 될 가능성도 있는 법인데 나의 마음주머니는 새가슴만 한가. 꿈이 작아 큰 인물도 되지 못했고 손이 작아 쌓아놓은 재물도 없다. 깜냥이 고만한 내게는 늘 그 정도의 세상만 허락되었다. 그 주제에 간신히 마련한 집 한 채가 이제는 무겁다. 돌아보면 소유보다는 존재에 집착하며 조금은 허황되게 살아온 셈이다. 밥을 팔아 꿈을 사고 싶은 여자, 나의 오랜 지병이다. 그러나 그 병이 내가 먹고 자란 양식이었다.

달팽이처럼 몸담을 껍질하나가 나의 전 재산이다. 작은 아파트 하나 사고 생전 처음으로 마음 가는 이웃도 한번 돌아보았다. 담 안의 것만이 내 것인가. 창 넘어 보이는 신천이 내 강이요, 아파트 마당이 나의 정원이다. 내 소유가 아니어서 더 편안히 바라볼 수 있고 공유하기 때문에 더 아름다운 것인지도 모른다. 새로 얻은 정원에는 단풍이 한창이다.

가볍다. 홀가분하다. 이미 생의 반환점을 돌았으니 왔던 길 되돌아가는 걸음이야 가벼울수록 좋지 않은가. 누더기 두 벌과 고무신 한 켤 남기고 간 성철스님에 비하면 아직도 나는 부자다. 많이 가졌다. ‘가볍다’는 표현에 일말의 가책이 느껴질 땐 생존에 필요한 최소한의 소유라고 스스로 변명을 해보기도 한다. 집하나 줄이고도 이리 홀가분한데 재벌, 그들은 무거워서 어떻게 사는가. 소유와 동시에 그 무게만큼 사회적 책임과 의무가 따른다는 사실을 그들은 알고 있을까. 아니면 무지무지 통 큰 사람들일까.

바람이 뒤 창문 가득 쏟아져 들어와 열린 문을 밀치고 남쪽으로 빠져나간다. 북풍이 머지않아 겨울을 데려올 모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