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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세상/좋은수필 2

[좋은수필]홍시 / 이정연

홍시 / 이정연 

 

 

홍시는 늦가을 감나무 아래서 먹어야 맛있다. 운 좋게 낮은 가지에 달린 걸 따 먹어도 좋지만 방금 떨어져 절반쯤 터진 것을 주워 먹어야 제 맛이다. 풀 향기를 실은 바람은 코끝에 향기롭고 온갖 벌은 거기 다 모여 잉잉거린다. 파란 하늘에 점점이 붉은 감을 쳐다보며 먹는 홍시 맛은 거실에서 TV보며 깎아 먹는 사과 맛과는 다른 서정이 있다. 물러 터진 홍시는 아무리 조심해도 손에 안 묻히고 먹기 힘들다. 그럴 때는 종이처럼 마른 감잎의 까슬까슬한 뒷면에다 쓱쓱 닦으면 그만이다.

늦가을엔 홍시 먹는 재미로 지낸다. 다른 과일은 별로 내 차지가 되지 못하는데 홍시는 식구들이 잘 안 먹어 혼자 두고 마디게 먹는다. 남편은 손에 묻는 게 귀찮아서 싫어하고, 아이들은 엄마가 하도 좋아하니까 자진해서 안 먹는다고 한다.

홍시는 어떻게 먹어도 맛있다. 아이처럼 꼭지를 아슬아슬하게 잡고 얇은 비닐 막 같은 껍질을 조심조심 까서 먹어도 재미있고 아버님처럼 홍시 정수리에 열십자로 칼집을 내고 빨아 먹는 방법도 있다. 또 꼭지를 떼고 꼭지 쪽으로 쪽쪽 빨아 먹고 풍선처럼 부풀려 다시 꼭지를 닫아 놓으면 틀림없이 누가 '어 홍시네'하고 집는다. 그 때 손뼉을 치며 자지러지면 홍시 먹는 재미가 배가 된다. 그건 내가 어릴 때 오빠가 주로 치던 장난이다.

그것도 싫증나면 반으로 잘라 손바닥에 놓고 얇은 놋숟가락으로 떠먹는 것도 재미있다. 오랫동안 병상에 누워계시던 할머니가 드시던 방법이다.

홍시를 앞에 놓고 그 때를 회상하며 온갖 방법으로 까불대며 먹어 본다. 어느새 홍시는 만복감의 충족을 위한 단순한 과일에서 아름다운 추억으로 격상된다. 한 알 두 알 아껴가면서 먹다보면 부른 배만큼이나 행복해지고 앓고 있던 향수병마저 깨끗이 낫는다. 상자 째 사놓았던 홍시가 하나 둘 줄어 바닥이 보이기 시작하면 쌀 떨어진 것만큼이나 불안하고 새 상자를 들여 놓으면 풍년농사 추수한 농부처럼 푸근하다. 내가 홍시 맛에 이렇게 눈물겨워하는 건 맛도 맛이지만 아련한 추억 때문인지 모른다.

11월이 되면 오빠와 나의 주요 일과는 감 따기였다. 그럴 때는 멀리 마을을 내려다보았다. 초가는 감나무에 파묻혀 보이지 않고 마을은 불길에 쌓인 것처럼 온통 붉었다. 그 불길 속에서 이따금 낮닭 우는 소리며 송아지 우는 소리가 새어 나왔다. 마을을 내려다보는 것도 싫증이 나면 오빠를 쳐다보았다. 하늘은 눈이 시리도록 파랗고 꽃처럼 붉은 감 사이로 오빠가 부지런히 전지를 밀었다 당겼다 하고 있었다. 감나무 아래는 융단처럼 뒤덮인 보랏빛 꽃향유가 향기롭고 군데군데 떨어진 홍시엔 벌들이 뭉텅이를 이루고 붙어 있었다. 날아드는 벌도 구경하고 어쩌다 나비와 벌이 싸우는 것도 지켜보면서 기다리면, 이윽고 감 망태가 동화에서처럼 스르르 내려왔다. 망태는 내 머리 위에서 한 번 주춤하고 정확히 내 가슴 높이에서 멈춘다. 망태를 받아 오빠가 미리 깔아 놓은 감잎 위에다 조심스럽게 쏟아 놓는다. 그리고 그 망태기가 다시 감나무 꼭대기로 올라가고 나면 나는 감꼭지를 땄다. 전지가위가 있었으면 편할 텐데 그게 없으니 엄지손가락으로 일일이 꼭지를 하나하나 밀어서 땄다. 꼭지를 따면서 큰 것과 작은 것 무른 것과 단단한 것을 대충 선별해 놓으면, 나무 째 흥정을 끝낸 감장사가 박스를 가지고 와서 담고, 마을 전체의 감을 한 번에 차에 실어 갔다.

감나무 아래에 앉아 있으면 간혹 예기치 못한 오줌세례를 받는다. 빗방울이 듣는 기척이 느껴져서 올려다보면 오빠는 어느새 바지춤을 올리고 있다. 미리 귀띔이라도 해주면 피할 텐데 그 점에 있어서 오빠는 늘 용의주도했다. 그런 오빠의 수줍은 폭력이 원망스럽지는 않았다. 나무에서 내려와 다시 올라 갈 수 있을 만한 기운이 오빠에겐 없었던 것이다. 허공에서 중심을 잡으며 감을 따는 일에 오빠도 너무나 지쳤던 것이다.

누가 동짓달 하루해가 짧다고 하는지…. 감 따는 날의 하루는 오뉴월 보다 더 길었다. 열 번, 열다섯 번, 벌써 스무 번도 넘게 망태를 받은 것 같았다. 손가락이 아파 더 이상 꼭지 따기를 포기하고 심술이 나서 보챘다.

"오빠 이제 집에 가자!" 소리 지르며 올려다보면 오빠는 감나무 꼭대기 아니라 아예 다닥다닥 감과 함께 하늘에 별처럼 붙박혀 있는 것 같았다. 아이처럼 작아진 오빠의 머리 위로 우짖던 산까지 떼도 날아가고 정수리 위에 있던 해는 벌써 기울어 서산에 가까웠다. 배도 고프고 한껏 부풀어 붉어진 해를 보니 까닭 없이 슬퍼서 오빠를 올려다보고 계속해서 소리를 질렀다.

"집에 가자, 집에 가자 말이야. 이젠 제발 가잔 말이야!" 까마득한 하늘에 있던 오빠에게선 아무 대답이 없고 스산한 바람이 내 목소리를 삼켜 버렸다. 한기가 소매 끝에 파고들어 나는 찔금찔금 울었다.

한참 있으니 대답 대신 감 망태기가 내 눈앞에 내려와 멎었다. 망태기를 벌리자 알록달록 물든 감잎에 싸인 홍시 두 개가 맨 위에 얹혀 있었다. 과육이 차오르다 못해 갈라터진 홍시 한 개와 너무 예뻐서 먹기 아까운 작은 홍시 한 개가 정겨운 남매처럼 나란히 기대고 앉은 모습….

가자고 보채기도 지쳐 홍시를 먹기 시작했다. 그 때 오빠는 보았을까. 노을에 젖은 어린 누이가 콩새처럼 쪼그리고 앉아 홍시를 쪼던 모습을.

시제 지내러 고향에 갔더니 아무도 감을 따지 않았다. 처절하도록 붉은 감나무는 그 때처럼 마을을 태우고 까치 떼는 불붙은 가지마다 요란한데 감 따던 오빠는 그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그 때는 고단하기 이를 데 없는 노동조차 이렇게 애틋한 그리움일 줄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