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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세상/좋은수필 2

[좋은수필]내 편 / 소진기

내 편 / 소진기   

 

 

텡레비전을 보다가 아내가 불쑥 아버지 꿈을 꾸었다고 하기에 나는 반색을 하고 돌아앉았다.  

“밥을 차려 달라고 하셔서 밥을 차려 드렸더니 아주 좋아하시던데요…….”  

평소 아내의 이야기에 건성건성 대답하던 내가 새로운 장난감을 본 아이의 눈망울처럼 적극성을 가지고 꼬치꼬치 물었다. 표정은 어떠하시더냐, 차림새는 어떻더냐, 다른 말씀은 안 계시더냐…….  

아내는 생뚱맞은 얼굴로 하루가 지났기 때문에 구체적으로 기억이 안 난다며 나의 호기심에 찬물을 끼얹었지만 나는 아내가 돌아가신 아버님께 꿈에서나마 밥을 차려 드렸다는 이야기 자체로도 충분히 흐뭇하고 기뻤다.  

초등학교 6학년 때 어머님이 돌아가신 후 집안에는 때도 없이 황량한 바람이 불었고 어린 나는 밤마다 악몽을 꾸곤 했다. 어머님의 빈자리는 여러 형태로 가족들을 괴롭혔고 당장 조석(朝夕)의 밥상에 놓인 반찬을 보면서도 슬픔은 울컥 나의 목젖을 때리곤 했다. 당시 열다섯 난 누님이 그럭저럭 살림을 꾸려 갔으나 손맛을 내는 음식이었을 리 만무했던 것이고 아버님은 제대로 된 밥상을 대하지 못하였던 것이다.  

성인이 되어 국 없이는 밥을 못 먹는 지금, 당시의 아버님을 생각하면 맥없이 쓸쓸해진다. 해장국 한 그릇 사 먹을 수 없는 농촌에서 일 년의 생계를 걱정하며 애진 마음 삭이며 한껏 취하신 후의 그 속쓰림을 어린 우리들이 생각할 수나 있었겠는가?  

자식을 둘 둔 나이에 이제서야 조금씩 아버지 사랑을 느낀다. 평생 흙을 파시고 사신 당신의 어깨에 내려앉은 짐이 얼마나 무거웠으며 곡주 한잔에 콧노래를 흥얼거리던 그 이면에 두 겹 세 겹 인간으로서의 삶이 있었다는 걸 모르고 지내 온 철없던 날들이었다. 소위 잘 나가는 아버지였으면 애달픔도 덜하리라.  

그러나 어쩌랴! ‘子欲養而親不待’란 말이 이런 연유로 생긴 뜻임을 절실히 깨닫는 일 외에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란 없게 되었다.  

요즘엔 딩크족이 유행이라고 한다. 결혼한 부부가 아이를 갖지 않는 족속들인데 그 이유가 참 시사하는 바 크다. 요즘같이 경쟁이 심한 사회에 자기 아이를 내보내기 싫어 아이를 낳지 않는다는 것이고 부부가 맞벌이를 해서 안정된 생활을 누리겠다는 것이다.  

어찌 보면 태어나지도 않은 아이에 대한 지극한 배려의 뜻이 숨어 있는 것 같기도 하나 그렇지 않다면 고고성을 울리며 태어나 이 세상의 모든 부귀영화를 누릴 수도 있었을 그 아기에게는 참 불쌍한 생각이 든다. 이유 있는 이유에 대한 이유 같지 않은 설명이지만 이러한 단면이 대가족사회에서 핵가족화되고 이젠 가족 해체로까지 이어지는 현대의 신산함을 보는 것 같아 씁쓸한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자리에 누워 아내가 꾼 꿈을 내가 다시 꾸고 싶다. 그러면 그저 ‘아버지! 저, 아버지 아들 맞지요?’라고 여쭙고 싶다. 사나이들끼리 무슨 말이 필요하겠는가?  

언젠가 어느 여류소설가의 산문집을 읽다가 한 구절에 가슴이 울렁거린 적이 있다.  

“세상에 유일한 내 편은 아버지다. 어떤 경우라도 진정 나의 편에서 생각해 주고 도와 줄 수 있는 존재, 그것이 아버지다…….”  

내 고독의 실체가 이런 것일 수도 있겠다는 발견의 기쁨도 있었다. 무조건적인 사랑으로 표현되는 부모와 자식 간의 사랑이란 건 동물이라 해서 진배없을 것이다. ‘동물의 왕국’ 등 방송에서 접하는 어미와 새끼 간의 지극한 사랑에서 오히려 우리 인간들이 많은 감동을 느끼곤 한다.

  우리 나라 역사에서는 왕이 되기 위하여 아버지를 죽인 경우는 없지만 중국의 경우에는 그런 경우를 흔치 않게 만나 볼 수 있다. 동물의 세계에서 새끼가 어미를 죽이는 경우를 나는 보지 못하였다.  

아내가 아버지 꿈을 꾸었다고 했을 때 내가 왜 그렇게 반색을 하고 꼬치꼬치 물었는지를 아내는 모를 것이다. 아내에게는 사랑을 받을 기회가 없었던 부재의 시아버지일 뿐이지만 나에게는 세상에 유일한 내 편인 것이다.  

오늘은 퇴근하면서 아들놈에게 이렇게 말해야겠다.  

‘니 편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