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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세상/좋은수필 2

[좋은수필]승자가 모든 것을 / 박현정

승자가 모든 것을 / 박현정

 

 

아파트 입구 화단에서 아주 작은 결명차를 보았을 때, 나는 걸음을 멈추었다. 눈앞에서 비에 젖은 결명차 잎이 바람에 흔들렸다.

자라는 동안 우리 집에서 내가 마신 음료는 결명자차였다. 물을 끓일 때 이런 저런 약재를 넣기 좋아하는 어머니가 선택한 것이 눈에 좋다는 결명자였다. 여름에서 가을까지 일 미터 정도의 결명차들이 자라 넓은 마당가에서 춤을 추었는데, 노란 꽃이 지고 길쭉한 꼬투리가 갈색으로 변하면 그것을 따서 말린 후, 알갱이를 꺼내어 볶아서 물에 넣어 끓여 마셨다. 그것은 차라기보다는 끓인 물을 마신 것이었다.

두 계절 동안 자연스럽게 자라 집 둘레를 차지하던 연초록의 결명차를 볼 수 없는 지금은, 한 알의 알갱이가 아담한 식물로 자라난다는 것 자체가 경이로우면서 새롭게 느껴진다. 어린 날이나 지금까지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는 결명차에 대한 기억이 나를 깨운다. 그것은 뜻밖에도 지난날의 풍요로운 그림으로 내게 다가온다.

그렇게 결명자차를 마시던 나는 중학교 삼학년이던 때 커피를 알게 되었다. 그 때 대학에 다니는 언니들이 커피에 식빵이나 비스킷을 적셔 먹는 것을 보았는데, 너무 맛있어 보였다. 영화에서 인간이 되고 싶은 천사가 꼭 하고 싶은 일 중의 하나가 커피를 마시고 싶은 것일 만큼, 커피는 천사마저도 매혹시키는 음료인가보다.

그 시절 내가 살던 곳에서 이웃해 사셨던 아주머니는 커다란 그릇에 커피를 타서 마시곤 하셨다. 아주머니는 젊은 시절 한 대중탕에서 일을 하셨는데, 목욕탕의 물을 데우기 위해 저녁 늦게까지 불을 땠다고 한다. 어둑하고 따뜻한 데서 오랫동안 불을 때고 있으면 자꾸 졸음이 몰려와서 간간이 커피를 마셨다는 것이다. 그게 습관이 되었는지, 일을 그만둔 지 오래된 지금도 하루에 커피 두 잔 이상을 마시지 않으면 기운이 없다고 하셨다.

고등학교 때 한 친구의 어머니는 식당을 하셨는데, 어느 날 그 분이 식사를 하시고, 둥근 대접에 겨자색 플라스틱 스푼을 휘저으며 뭔가 마시는 걸 보았다. 너무 맛있게 드시길래 숭늉인가 했더니, 바로 커피였다.

아라비아의 어느 산, 이름 모를 덤불에서 붉은 열매를 따먹고 즐거워하는 염소 떼를 본 목동이, 자신도 그 놀라운 열매를 먹고 근처에 알리면서 시작되었다는 커피의 세상 구경은 놀라운 성공을 이루었다. 예멘의 항구 도시 모카를 통해 커피는 전 세계에 퍼져나갔다. 그 커피를 매개로 해서 일어난 카페 문화는 아랍에서 시작해 프랑스와 이태리에서 꽃을 피워 담론의 장이 형성되었다.

깨끗한 공기 속에서 커피 냄새가 스며들면, 나도 커피에 이끌린다. 처음에는 염소를, 다음에는 사람을 놀랍도록 행복하게 만들었다는 그 커피 맛에 나도 동참하고 싶어진다.

모든 사람의 입맛을 길들이는 보편타당함과 함께 자신만의 귀족적인 향기 또한 잃지 않는 커피. 커피를 보면 나는 승자의 삶 같은 게 느껴진다. 아랍의 한 산골 출신의 닥은 알갱이가 전 세계인의 일상을 지배하는 음료가 되었다. 코르시카 촌뜨기에서 프랑스 황제가 된 나폴레옹처럼.

여름부터 무성해지는 대문 옆의 이슬에 젖은 결명차 무리가 다림질해 입은 내 옷에 물방울을 묻힐까 염려했던 결명차의 초록 잎과, 나의 애틋한 눈길 한 번 받지 못했을 단정한 노란 꽃잎을 기억한다. 우리 집 둘레에 넘쳐나게 자라났어도 아무렇지도 않게 지나쳐버린 지나간 시절의 결명차들이 이렇게 그리울 수 있을까. 너무나 가까이 있었기에 그 가치를 생각해 보지도 않았던 것인가. 결명자차는 물처럼 마셨기에 그 맛이 어떠했는지도 잘 생각나지도 않는다. 그러나 단 한 번 맡아도 커피 향기는 잊혀지지 않는다. 바로 그것이 커피가 지닌 재능일 것이다. 커피의 가치를 확신한 이들에 의해 커피는 자신의 재능이 갈고 닦여 익숙하면서도 새로운 향기로 세계인을 사로잡았다. 그리고 자신의 역사를 만들었다.

자판기 커피에서 마니아들의 호사까지 다양한 변신을 하며 사람을 휘어잡은 커피와, 내 기억 속에서 단정하고 변함없는 모습으로 남아 있는 결명차를 떠올린다. 나도 한때는 커피처럼 되기를 희망한 적이 있을 것이다. 때로 그늘진 삶이 주는 안타까움에 매료되면서도 인생에서 한 번쯤의 영광을 꿈꾸는 것은 모든 이의 마음이 아닐까.

결명자차에서 나는 제 분수를 지키며 만족하는 단순한 삶을 본다면, 커피에서는 재능과 노력, 마케팅이 어울린 성공이 주는 환희를 읽는다. 작은 사람들의 작은 이야기가 아무리 아름다울지라도 세상은 결국 승자의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결명차 : 콩과에 속한 한해살이 풀

*결명자 : 결명차의 씨

*결명자차 : 살짝 볶은 결명자를 달인 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