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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세상/좋은수필 2

[좋은수필]나를 꿈꾸게 하는 / 오기환

나를 꿈꾸게 하는 / 오기환 

 

 

산과 바다의 기운이 하늘의 기운과 서로 만나면, 구름과 안개를 일으켜 비와 눈이 되어 내린다. 또 이슬과 서리가 되고 바람과 우레도 된다. 자연은 이렇듯 동화와 순환, 상생과 조화로 사계를 이루고, 사람들은 그 속에서 자연이듯 살아간다. 비 내리는 날이면 창문을 열고 빗소리를 듣는다. 물안개에 젖어드는 앞산을 바라보면서 우산을 들고 길을 나선다.  

 

봄에 내리는 빗소리는 갓난아기의 옹알이 소리다. 젖 넘어가는 소리다. 잠자리 잡으러 살금살금 걷는 소년의 발뒤꿈치 소리다. 그리움이 안개 되어 마음을 휘감는 소리다. 왈츠를 추는 여인의 드레스가 흔들리며 바르르 속으로 떠는 소리다. 연인들이 환하게 웃으며 속으로 두근거리는 소리다. 한지에 먹물 번지듯 마음이 스며드는 소리다. 

 

여름에 내리는 빗소리는 문 두드리는 소리다. 두서너 번 두드리다 인기척이 없으면 좀 더 강하게 그래도 소식이 없으면 방망이질하듯 두드려대는 소리다. 욕망을 숨긴 채 누르고 참다가 폭발하는 소리다. 지축을 뒤흔드는 천둥소리다. 퍼붓듯 쏟아지는 빗소리는 마음속 불덩어리를 쏟아내는 소리다. 울부짓듯 쏟아지는 비바람소리는 아버지 상여를 쫒아가는 13살 소년의 울음소리다. 

 

장맛비가 잦아든 여름 어느 날 연못가, 새벽녘에 가만히 연잎에 귀를 대본다. ‘두두둑…’하며 연꽂 터지는 소리. 연 잎사귀에 이슬 구르는 소리가 연못 가득 퍼진다. 아침 햇살에 붉은 연꽃잎 벌어지는 소리, 산들바람에 우욱 밀려오는 소리 은근한 연꽃향기, 연못 위를 미끄러져가는 청둥오리 떼, 나는 연못향기에 취해 가뿐 숨소리를 참으며 연못가를 서성인다.  

 

비 내리는 날이면 둑길을 걷는다. 물을 저장하고 공급하는 둑, 둑은 구름이고 비다. 하늘이고 해다. 어머니 품이다. 둑은 다 감싸 안는다. 그러나 둑 속에는 재앙도 미래도 들어있다. 비 내리는 여름이면 둑길을 걸으며 마음을 다독인다.  

 

비 내리는 날이면 여행을 떠난다. 빗속을 달린다. 높은 산을 끼고 도는 산길이다. 물기를 머금은 바닷바람이 이 산을 넘지 못하고 비를 쏟아낸다. 그래서 산꼭대기에도 물푸레나무가 산다. 물푸레나무를 뒤로하고 계곡으로 들어선다. 물소리가 계곡을 가득 채우며 흐르는 길을 달린다. 늘 젖어있는 계곡에 물과 바람과 나무와 풀과 야생초가 꽃을 피우며 살고 있다. 계곡의 끝은 또 다른 시작을 알리는 이정표다. 평야가 나타나고 이어서 바다가 보인다. 떠나는 것은 걷고 달리고 보고 느끼고 쉬는 일의 뒤풀이다. 

 

차를 세우고 바다를 본다. 바다색은 푸르다. 에메랄드빛이다. 쥐색이다. 아니, 바다색이다. 변화무쌍한 내 마음속 색깔이다. 물안개는 섬과 바다의 경계를 뒤흔들어놓는다. 물과 바다의 경계를 알리는 물보라는 섬과 바다를 구별해 준다.  

 

고깃배 하나, 물살을 가르며 수평선을 넘는다. 또 그 뒤를 따른다. 고깃배는 물안개에 묻히고 엔진소리가 바다에 가득 찬다. 여명을 알리는 소리다. 비가 드리운 장막 너머에는 붉은 빛이 번진다. 산불처럼 바다를 삼키고 있다. 저쪽은 일출, 이쪽은 비가 내리고 물안개를 머금은 바다는 꿈꾸고 있다. 몽환적이다. 여름바다를 적시는 빗소리에 나는 한 번 더 꿈을 꾼다. 

 

가을 산에 내리는 빗소리에 가랑잎이 허공을 흔든다. 쓸쓸한 소리다. 가을 산은 만산홍엽이다. 나무는 성장을 멈추고 잎사귀에 붓칠을 한다. 붉은 색이다. 단풍이 지고나면 붉은 열매가 새들의 눈길을 붙잡는다. 가을은 새들이 열매를 먹고 배설하라고 진한 색을 칠해 놓고 잎을 떨어뜨리기 시작한다. 하늘에서 불어오는 바람소리는 가을 산이 ‘대님 푸는’ 소리다. 그 소리가 바람에 묻힌다. 빈 몸으로 겨울 강을 건너서 봄을 준비해주는 가을날에 나는 스웨터를 껴입고 가을을 넘는다.  

 

겨울 숲에 내리는 눈은 삼베이불 뒤척이는 소리다. 어머니의 갈퀴손이 등 긁어주는 소리다. 겨울 산에 내리는 눈은 이불이 되어 산천을 감싼다. 쌓인 눈 녹는 소리는 목마른 숲이 목 축이는 소리다. 곧이어 들이닥치는 엄동설한, 눈보라는 빽빽한 나뭇가지를 휘게 하고 밑동을 넘어뜨린다. 산천을 울리는 소리는 늙은 나무가 주저앉는 소리다. 그 빈자리에서 어린 나물들은 양분을 취하며 어깨를 쭉 펴는 사이로 바람도 지나고 날짐승도 둥지를 튼다. 부산한 생명의 소리다. 그 소리는 봄을 꿈꾸게 하는 소리다. 

 

나는 겨울이 오면 방한복을 입고 겨울 산을 간다. 산골짜기 개울가에서 걸음을 멈춘다. 얼음 밑으로 흐르는 물소리는 깊은 밤 한쪽다리가 굵은 실로된 검정 뿔테안경을 쓰고 삯바느질하는 어머니 소리다. 이 소리는 실망과 좌절을 극복하는 소리다. 아니, 스스로 아픔을 다독이며 자식의 봄을 바라는 기다림과 인고의 소리다. 

 

삯바느질소리, 나는 이 막막한 인생의 겨울 고갯마루에서 예의 그 바느질소리를 들으며 내일을 꿈꾼다. 한 번 더 봄을 꿈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