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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세상/좋은수필 2

[좋은수필]정과부 / 정명숙

정과부 / 정명숙

 

 

글자가 생기고 나서 인류에게 가장 많이 공헌한 것이 편지다. 의사전달 수단인 편지는 옛날부터 수많은 희비극을 전했다. SOS로서의 편지의 역할은 참으로 컸다.

한나라의 소무가 흉노에게 감금되어 20여 년 고생 끝에 기러기 발에 편지를 매달아 보냈다는 고사에서 안서(雁書)가 생겨 났고, 옥중 춘향이가 한양 낭군 이도령에게 만리장서로 쓴 두루마리를 방자편에 보낸 것도 유명하다. 어디 그뿐인가, 서양의 밸런타인데이도 안서와 비슷한 이유로 해서 공개구애의 수단으로까지 발전되어 많은 사연들을 남겼다.

1954년 환도 직후의 어수선한 서울, 내가 다니는 대학 총무과 옆 초라한 편지함에 난데없는 괴엽서가 날아들었다. 그 당시는 위문편지 답장이나 올까 할 때였다. 도무지 납득이 가지 않는 내용이다. 내 옛 애인의 필체를 내가 모를 리 없는데 그 사람이 쓴 양 그의 이름으로 연출한 내용이었다.

“정형 보고싶소. 이번 토요일 충무로 ◯에서 ◯시 기다리겠소.”

아무리 뒤집어 보아도 필체가 아니었다. 옳지, 심중이 가는 데가 있었다. 얼마나 괘씸한지 배신당한 것 같은 분노가 치밀었다. 친구들은 영문도 모르고 꼽사리 낄거라는 둥 한턱 내라며 야단이지만 나는 속으로 벼르고 있었다. 약속한 날은 하루하루 다가오고 짓궂은 친구들은 잊지도 않고 내 뒤만 따라 붙었다. 한참 열애중인 남편이 꼬시는 바람에 나는 속도 없이 남자친구 이름과 사연들을 과숙한 늑대같은 남자에게 다 털어 바쳤더니 한다는 수작이 이것이었다. 아마 그래서 고금동서를 막론하고 처녀 때 편지나 일기는 꼬투리가 되니 다 없애버려라 하고 연애 같은 것은 결혼과 동시에 딱 잡아떼버려라 했나 보다. 그런데 이 철없는 것이 다 털어 놓아 버렸으니 사나이 가슴에 오해와 질투에 불을 지르고 만 것이다. 아니라도 미숙한 이대생에게 과숙한 기혼남자였으니 그로서는 그럴 만하다고 하겠지만 그 소행이 너무나 괘씸했다.

약속한 날이 밝자 아치부터 괜히 마음이 진정되지 않았다. 친한 친구에게 사정이야기를 하며 궁리해 낸 각본은 남편을 내 친구가 전화로 불어내자는 연극이었다. 그리고 그 자리에 친구 대신 내가 나가 그의 놀라는 꼴로 복수를 했다. 그 후 우리는 결혼했고 수많은 오해와 곡해 속에 지겹도록 살아냈다.

가극 ‘리골레드’ 중 ‘여자의 마음’의 아리아는 여심을 갈대와 같다고 했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지 않는다. 변하기 잘하는 것은 여자가 아니고 남자의 마음이고 여자의 마음은 변하지 않는 대신 오해를 잘 해서 탈이다. 오해는 편견을 고집하는 데서 온다. 그리고 자기의 편견으로 인해 생긴 오해를 풀지 못하는 것은 곡해라 한다. 말하자면 아는 억지니까 애교로 볼 수도 있지만 오해는 정말 무서운 독기를 가지고 가정을, 사회를 역사를 뒤흔들고 마는 경우가 있다. 내가 아는 일흔이 넘은 어른이 처녀 때 일을 낱낱이 기억해 두었다가 다 죽게 된 늙은이하고 무릎맞춤하는 것을 보고 오해는 정말로 무섭다는 것을 실감했던 일이 있다.

어쨌든 나는 결혼 20여 년 동안 오해 받는 일은 되도록 피하며 살았다. 귀찮기도 하고 시끄럽기도 해서였다. 그리고 그 질투쟁이 영감탱이는 갔다.

사람은 어느 시대라도 사람과의 만남으로 살아가게 되어 있다. 살아가노라면 좋을 때도 있지만 그렇지 않을 때가 더 많은 것이 우리들의 일생이다. 어려운 일을 당하고 넘길 때 진짜 친구가 필요한 것이다. 흔히들 남녀간에는 우정 같은 건 존재할 수 없고 연애나 존경 아니면 적의는 있지만 우정은 있을 수 없다고 한다. 만약 있다면 그것은 순간이 만들어 낸 꽃이며 시간이 연출해 낸 열매일 것이라 한다. 내 딸이 유치원 다닐 때 그렇게 친하던 남자아이가 초등학교 입학과 함께 서먹해지더니 중학생이 되자 모르는 채 달아나는 것을 보았다. 왜 남녀간에는 우정이라는 것이 지속될 수 없을까.

인간 삶에 대하여 <발경(勃經)>에서는 친구를 네 가지로 나누어 말하고 있다.

 

화우(華友) : 어려울 때 등 돌리는 의리 없는 친구.

칭우(稱友) : 친구 몇을 놓고 저울질해서 이로운 쪽으로 재빨리 기울어지는 친구.

산우(산우) : 산행의 리더격인 위엄있는 친구.

자우(地友) : 대지와 같이 무엇이든 들어주며 어머니 품과 같은 편안한 친구.

 

사람은 모든 걸 다 잃었을 때 강해진다고 한다. 남편이 가고 나니 세상이 달라졌다. 아니 세상은 달라지지 않았는데 인심이 달라진 것이다. 해는 여전히 뜨고 지고 아무일 없었던 양 너무나 냉혹했다. 그것이 억울하고 분해서 밤마다 울었다. 내게서 모든 것은 다 떠나가고 더 잃을 것이 없는 것 같았다. 어느 날 정신문화원 Y교수가 나을 보고 말했다. 그는 나를 누님 누님하며 따르던 남편을 좋아하던 후배였다.

“누님 이제부터는 여자친구보다 남자들이 누님을 도울 거예요.”

그 말이 무엇을 말하는지 나는 잘 몰랐다. 그 후 20년이나 살아가는 동안 그 답을 알 수 있있다. 몇 년 전 일 년이면 한두 번 도깨비처럼 밤중에 전화로 문안하던 남편의 악동 같은 친구가 어느 날 밤 느닷없이,

“정과부 뭘 해.”

얼떨결에 나는 대답이 궁해 수화기를 든 채 있었더니,

“달은 저렇게 구슬피 밝은데 벗은 없고….”

하더니 흐드득 흐드득 흐느껴 운다. 남편이 갈 무렵 달이 떠도 달이 져도 해 저물어도 청승맞게 서러워하더니, 그 꼴이 났다 보다. 아까 같아서는 주책이라 욕이나 한 바가지 퍼부어 주려고 했는데 그 마음은 곧 사라져버렸다.

한 40년 전 우리가 결혼한 집에 와서 무던히 괴롭히던 남편의 술친구로 당시 없는 살림에 술내라 돈내라 속깨나 썩이던 동갑내기 시인이었다.

1992년 딸 결혼식에 옛날 애먹인 값이라며 꽤나 많은 축하금으로 나를 놀라게 했다.

‘오래 살고 볼 일이다.’ 철 나지 못하고 죽는 사람도 많은 세상에 옛 우정에 보답하려는 순정에 감동하여 나는 울었다. 젊은 애인이 생겼다며 젊어지더니 그 애인이 제비 따라 가벼렸다며 엉엉 울며 위로주 사라고 응석도 부렸다. 노망인지 망령인지 시도 때도 없이 오밤중에 주정반 푸념반인 전화 공세에 나는 시달렸다.

“에이 못난이 보보 같으니라구. 사나이가 오죽 못났으면 애인 뺏길까” 하면서도 밉지 않았다. 그 옛날을 알아주고 말이 통하는 대상이 있다는 것은 좋은 일이다. 남편이 이 새끼 저 새끼 하던 친구인데 어느 사이엔가 나와 농을 주고 받는 사이로 바뀐 것이다. 무엇보다 관심을 가져준다는 것은 기운 나는 일이다. 가끔 내 글을 읽었다며 충고와 칭찬을 주니 기분이 나쁘지 않다. 혼자 잘 살아내는 친구마누라가 대견해서인지 이따금 남은 살쪄 죽겠다는데 고기 사준다며 나오라 앙탈이다.

친구…그래. 남편의 친구도 내 벗일 수 있지. 말끝마다 험구로 정과부 정과부해서 탈이지만 그렇게라도 입방아 찧고 나면 후련해서 체증이 내려갈 것 같으니 좋은 친구다. 지우는 못 되어도 내 남자친구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