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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세상/좋은수필 2

[좋은수필]만남이 뜻하는 것 / 지연희

만남이 뜻하는 것 / 지연희

 

 

 

우리의 생활은 끊임없이 이어지는 만남의 연속이다.

전생의 어떤 긴요한 인연의 끈을 쥐고 부부라는 이름으로 평생을 함께 하는 일이나 대문 밖을 빠져 나가지 무섭게 옷깃이 스쳐 지나고 눈길이 마주쳐 빛나는 만남속에서 이웃사촌이라는 두터운 정을 쌓으며 살고 있으니 말이다.

일천만 명에 가까운 서울 시민 가운데서 어떠한 만남에서 건 내 집 앞을 오가는 사람들 모두가 내게는 다 신비한 인연의 만남들이라는 생각이 든다. 만원버스나 혹은 지하철 속에 함께 하는 날이며 그들의 얼굴을 유심히 쳐다볼 때가 있다.

한순간이지만 같은 공간 속에서 호흡을 같이 하고 있다는 정스러움을 느끼게 되어 고개를 끄덕이며 졸고 있는 백발의 할아버지나 석간 신문을 읽고 있는 청년, 강아지 인형을 안고 강아지 같은 모습을 하고 있는 어린아이에게서 유독 가슴에 닿는 것이 있다.

지구의 한 구석 티끌 하나의 점으로 같은 피부와 말씨와 같은 민족의 사람들로 일정한 방향까지 동행하고 있다는 동료의식 비슷한 것을 느끼곤 한다.

얼마전 동일한 문학 장르의 사람들이 한자리에 모여 동인회를 결성할 때에도 저마다 생면부지의 어설픔을 느끼고 있었지만 날이 길수록 긴밀한 인연이기나 한 듯 우리는 만날 때마다 결속의 장을 쌓아가고 있다.

찬바람이 스쳐 지나듯 잠간의 면대라 할지라도 그 속에서 생명의 숨결을 확인하고 진실을 주고 받음과 나아가서 훈훈한 인정까지 교환하게 됨을 기뻐하곤 한다.

만남이란 사랑이라는 감정적인 것으로 두 연인을 짝지우기도 하지만 다정한 친구 사이로 오래도록 우정을 지키기도 하면서 한편으로는 스승과 제자로 만나 가르침을 주고 받기도 한다.

선인에게선 고매한 품격을 나누어 받고 악한 사람에게선 그만한 불신의 크기만큼 옳지 못한 것의 의미를 확인하면서 참다움의 가치를 깨닫고 있는 것이다.

불혹의 나이를 눈앞에 두고 있지만 많은 순간의 만남이 있었다.

그 만남의 형태는 각기 다른 것이었으나 피부 겉에서 피부 깊숙이까지 동여매어지던 실날같은 만남의 끈이 오늘의 나를 이끌어 주었던 것이다.

부모나 형제. 남편과 자식. 스승과 친지. 이웃과 그리고 감성어린 눈빛들. 은혜로운 만남이었고. 다정다감함을 전해주던 사람들이다.

슬픈 만남이 있었다.

처음부터 약속된 것은 아니지만 헤어짐으로 다시 만날 수 있다는 시인 한용운 님의 ‘님의 침묵’을 읊어 본다.

“사랑도 사람의 일이라 만날 때에 미리 떠날 것을 염려하고 경계하지 아니한 것은 아니지만 이별은 뜻밖의 일이 되고 놀란 가슴은 슬픔에 터집니다.”

“우리는 만날 때에 떠날 것을 염려하는 것과 같이 떠날 때에 다시 만날 것을 믿습니다. ”

처음엔 아주 짧고 가느다란 또는 연약한 그리고 두려움 속에서 시작되던 것이 점차 굵기를 더하더니 나아가서 믿음과 신뢰의 끈으로 이어질 수 있었던 만남들.

때때로 넘쳐 흐르는 기쁨이 가슴 한편에서 신기루처럼 떠오를때가 있다.

어떤 감사로운 만남에 대한 행복감 같은 것이다.

나는 그때마다 아주 우연찮은 곳에서의 만남이 그토록 소중한 것임을 돌이키지 않을 수 없다.

멀고 험한 나그네의 발길에 등불 하나 밝혀진 외딴집 같은, 만남의 기쁨이 뜻하는 것.

그것은 하나의 선과 선이 서로 맞닿아 보다 튼튼한 믿음이나 신뢰로 이어져 진실의 바탕이 되어 참으로 귀한 관계로 남는 것이다.

문단에 들어 글을 쓰게 된 연유에 있어서도 내 문운이라 말 할 수 있는 것. 그것은 아주 비좁고 어두운 쥐구멍에서 볕을 받아 광명을 찾은 셈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혹은 늘 표현하듯이 골목길 시멘트 바닥의 사선으로 벌어진 틈새를 비집고 대기에 오른 이름없는 풀꽃하나가 따사로운 햇살과의 벅찬 만남이랄까 그런 것이라 말할 수 있다.

감사로운 만남이었다.

A선생의 이끄심이 그것이었고, B 선생의 보살핌이 그것이라 생각된다.

어둠의 깊이를 조금씩 비춰주던 손길은 마침내 두꺼운 각질속의 몸체를 들어내어 눈부신 햇살과 싱그러운 대기속에 호흡케 한 것이다.

마치 철학자 플라톤이 그의 스승 소크라테스와의 해후처럼 말이다.

어느 날 성북동 댁으로 향하던 선생님의 택시 속에서 지긋이 눈을 감고 계시던 A선생님은 아무 말씀도 없이 내게 손을 뻗어 차갑고 가느다란 내 손을 잡아 주셨다. 친정 어머님 같은 따사로움으로 아주 한참 동안을 그렇게 하고 계셨다.

나는 그 손과 손이 맏 닿은 지점에서 전달 되어가던 어떤 믿음같은 것을 발견하고 있었다. 믿고 의지해도 좋다는 안식 같은 것을.

B선생님께 나는 항상 어떤 빚을 지고 있다는 생각을 한다. 갚지 못할 빚을 지고 살고 있는 듯 하다.

왜 그리 고맙고 미안하고 죄송스러운지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고마움을 들어낼 방법조차도 나는 잘 알고 있지 못하지만 폭우가 지난 뒤 무릎까지 불어난 개울물에 징검다리를 놓아 주시듯 선생님은 내 문학 수업의 어려움이 있을 때마다 한 걸음씩 앞으로 나아가도록 힘이 되어 주셨다.

잘 드러나지 않게. 아무런 말씀도 없이 아무런 표정도 지어 보이지 않지만 나는 선생님의 깊은 보살핌을 하나 하나 느끼지 않을 수 없다.

헬렌켈러가 사리반 선생님을 만나 어둠에서 광명의 빛을 찾게 된 만남과 같이 모든 감각적인 것에서부터 지각적인 사고에 이르기까지 서생님은 나를 이끌어 주신 것이다.

훌륭한 스승을 모실 수 있다는 건 일종의 행운과 같은 것이다.

초등학교 시절을 통하여 처음으로 스승에 대한 존경심과 은혜로움을 느낄 수 있었던 나는 고학년 3년 동안의 담임선생님을 통하여 내 일생에 있어 가장 원초적인 다시 말해서 가장 근본적인 인격형성에 있어 도움을 주지 않았나 생각한다.

지금은 고인이 되신지 오랜 일이지만 선생님의 가르침에서 나는 가난 속에서도 기쁨을 잃지 않았고 항상 어떤 희망을 가지고 그에 맞는 능력을 키워 나갈 수 있었다.

‘할 수 있는데 까지 하라’

는 표어를 교실 중앙에 붙여 놓으셨던 선생님은 매일 한 번씩 그를 지켜야 한다고 버릇되어 말씀하셨다.

자신이 가지고 있는 능력만큼 최선을 다하여 매사를 행하여라.

그때에 비로소 발휘한 힘 만큼의 만족을 얻어낼 수 있을 테니까.

선생님의 그 같은 가르침은 내 생활의 가장 잊혀지지 않는 교훈으로 삼아 그를 실천하기에 노력하고 있다.

크고 작은 일이라도 최선의 힘을 기울일 때가 아름답다.

그 최후의 결과에 대해선 따지지 말자.

손에 쥔 잘 익은 사과의 열매가 보다 큰 것이면 기쁨으로 맞이하며 비록 작은 것이라 할지라도 최선의 힘을 기울이던 아름다운 과정이 있었기에 진실된 생활이지 않겠는가.

선생님은 내게 그같이 길들여지기를 원하셨다. 나는 요즈음 내 아이들에게 선생님의 가르침을 전하고 있다.

고교 입시 준비에 열중하고 있는 큰아이에게 마치 내가 옛 스승을 만났을 때와 같이 어미와 자식의 관계를 넘어서 두 호흡이 하나로 만나는 만남의 자리를 마련하는 것이다.

선생님께서 돌아가시기 1년 전, 나는 선생님을 찾아 뵙고 문학을 하는 사람이 되겠다고 당시만 해도 큰 욕심을 부리며 당당하게 다짐을 했었다.

나는 지금 얼마 만큼 그에 맞도록 할 수 있는 데까지 최선을 다하여 노력해 왔을까 생각하곤 한다. 아직도 첫걸음을 시작한 어린아이와 같아 떨어지는 한 걸음 한 걸음이 미숙하고 부끄럽다는 생각이지만 다만 나는 계속하여 할 수 있는 데 까지 내게 주어지는 일에 최선을 다하고 있음을 선생님께 전하려 한다.

저 먼 세상 저세상에 닿을 때 까지.

만남의 소중함이 어찌 스승과 제자의 관계 뿐이랴.

사랑을 위하여 왕위를 버린 에드워드 8세가 미국 여인 윌리스 위필드 심프슨 여사를 만나 세기적 사랑을 나누지 않았다면 그는 제왕으로서의 곤란한 직위에 묶여 오래도록 진실한 사랑 하나로 안락한 생을 다 할 수 없지 않았겠는가 싶다.

에드워드 8세가 그녀를 만나 세기의 이목을 모았던 것은 1936년 당시 웨일즈의 황태자였던 41세의 노총각 에드워드는 푸른 눈의 우아한 미국 여인 심프슨을 사랑하게 된 것이다.

영국의 황태자와 한 번의 이혼 경력이 있는 유부녀와의 사랑은 순조롭지 않았다. 조지 5세가 사망하고 에드워드 8세가 왕위에 오르게 되지만 왕의 자리에 올라서도 그녀를 사랑하고 있던 에드워드는 당시 영국 왕실의 반대를 무릅쓰고 즉위 10개월 만에 왕좌를 버리고 그녀와 결혼식을 올린 것이다.

이같은 원대한 사랑의 힘이 작용하기까지를 그리고 생을 다하도록 이어 갔다는 것을 세인들은 그리 쉽게 생각하지 않는다.

그것은 메셀드 몽테이뉴 에세이에서처럼 ‘행복한 결혼이란 영내의 동반과 연애의 조건들을 거부하는 법이다. 그것은 우정의 조건들을 재현코자 노력한다. 그것은 인생의 감미로운 결합으로 항심과 신뢰와 무수한 유일하고 견실한 상호간의 봉사와 의무로 가득 차 있는 것이다’라고 전하듯이 결혼 생활이란 보다 깊은 차원의 만남이어야 한다는 생각이다.

참사랑을 지키기 위하여 온갖 영화를 뿌리칠 수 있었던 경지는 전생에 끊지 못할 어떤 만남이라는 인연이 그들을 사랑의 포로로 짝지어 놓았음이라 본다.

89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난 심프슨 여사의 회고록에 ‘나는 결코 아름답지도 않다. 아마 내가 그의 (윈저공) 내적인 고독을 파고 들었던 모양이다. 그렇게 위풍당당한 남자가 왜 나에게 이끌렸는지 모른다’고 했다.

그녀는 윈저공과의 만남에서 참으로 진실한 사랑을 얻을 수 있었으며 그 사랑은 세상의 무엇과도 바꿀 수 없지 않았잖을까.

윈저공과 심프슨 여사와의 만남은 아니지만 결혼 전 내가 처음 지금의 남편을 만나던 날이었다.

직장 거래처에ㅐ서 우연찮은 계기로 알게 되면서 전화데이트를 나누어 오던 차에 한번은 그에게서 직접 만나서 따뜻한 차라도 마시자는 제의를 받았다.

퇴근 후 정확한 약속 시간에 맞추어 약속 장소에 닿았던 나는 어찌 저리도 성급한 남자가 있을까 싶게 마치 도망치듯 다방문을 나서는 그와 정면으로 마주치고 말았다. 그는 어떤 실수라도 한 것처럼 쓸쓸한 표정을 지으며 문을 박차고 밖을 향해 걸어 나오고 있었던 것이다.

여자를 기다린다는 것은 도저히 체질에 맞지 않는다든가. 혹은 실없는 여자가 점잖은 사람 바람이라도 맞추는 가 싶게 생각했거나 아니면 그 당당한 자존심이 단 5분도 기다릴 수 없는 여유롭지 못함으로 여자쯤 하는 자신 만만함이 그를 지배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지금도 그가 여자는 남자의 갈비뼈 하나로 빚어진 하찮은 존재라면서 경시하는 거만스런 태도로 말이다.

참 다행이었을까. 우리는 다방 문밖에서 마주치면서 함께 따뜻한 차를 마실 수 있었고 식사를 하고 영화감상을 하며 오늘의 남편과 아내로 이어가고 있는 것이다.

그날 그 약속 장소에서 단 1분을 앞서 그가 문을 빠져 나갔더라면 지금쯤 어찌 되었겠는가.

우리는 남남이라는 지극히 무관한 관계의 사람이 되어 서로를 관여하지 않고 있을 것이다.

얼마나 냉랭한 관계일까. 알고 있지 않다는 어설픔. 관심 밖의 관계라는 것. 무관심이라는 허허로움은 어둠 속에서 만나는 한기처럼 몹시 온몸을 움츠리게 한다.

만남이란 참으로 따뜻한 것이다.

티 테이블이라도 앞에 놓고 마주하는 정감어린 만남은 우리의 영혼을 한층 풍요롭게 할 것이다.

무언가 계산하지 않아도 좋은, 어떤 목적을 타결해 나가지 않아도 좋은 태초의 맑은 심성으로 얼굴 마주하는 만남이었으면 한다.

하루 한 번씩 대문가에 우유를 배달하는 나이 지긋한 아주머니처럼 반가움 기쁨. 슬픈 일들을 빠짐없이 배달해 주는 우리 동네 집배원 아저씨와의 매일 같은 만남을 나는 기대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