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매원의 봄 / 이기창
춥다고 일을 미룬 것이 화근이었다. 벌써 끝내어야 할 매실나무 전정(剪定)을 아직 마무리하지 못하고 게으름을 피운 것이다. 나태해진 일상이 무미건조하고 무력감을 느낀다. 추위 때문에 움츠린 채 실내 생활을 많이 한 탓이리라. 심기일전해야겠다는 생각에 마음을 다부지게 먹고 새벽 미사를 위해 집을 나서니 겨울 칼바람이 뼈 속까지 파고들었다.
추운 날씨 때문에 오늘도 농원에 가기는 틀렸다는 생각을 하면서 성당 마당으로 들어서려는데 파지 수집하는 동네 할머니가 반갑게 다가왔다. 춥지 않느냐고 인사를 했더니 이럴 때 일수록 열심히 준비해 놓아야 다가오는 봄맞이가 수월해 진다고 했다. 파지를 많이 모았다고 즐거워하시는 할머니의 웃음이 삶의 진지함과 희망을 느끼게 하였다.
할머니 덕분에 용기를 얻어 농원에 갔다. 나무도 추위를 간신히 견디며 긴 겨울잠에 빠져 있을 것이라 생각했는데 예상은 빗나갔다. 메마른 등걸에 죽은 듯이 붙어 있는 가지에는 이미 팥알만 한 꽃눈이 맺혀 해산이 멀지 않았음을 예고하고 있었다. 제때 정지(整枝) 작업을 해주지 못하고 새 생명을 잉태한 가지를 자르려니 미안하고 측은해서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
메마르고 척박한 땅에 뿌리를 내려 인고의 세월을 견뎌낸 나무들이 거룩한 생명의 신비를 실감하게 해주었다. 가지마다 옹골지게 맺혀서 옹기종기 매달려 있는 꽃눈은 새봄의 희망을 말없이 키우고 있었다.
잘라낸 가지가 아깝고 미안해서 한 다발 가져와 가게의 도자기 꽃병에 꽂아 놓았다. 난방과 햇살 덕분인지 꽃눈은 하루가 다르게 커지는 모습이 역력하였다. 보름쯤 지나서였을까. 가게 문을 열고 들어서니 하얀 매화가 활짝 피어 있었다. 꽃만이 아니었다. 매화 향이 가득한 가게 안은 따뜻한 봄날 매실 농원에 온 기분이었다. 찻잔에 매화 한 송이 띄우니 옛 선비의 다반향초(茶半香初) 수류화개(水流花開)의 경치를 알 것 같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것은 한겨울 동안 고통을 이겨내고 모아둔 영양분을 수진해 버린 꽃눈의 아픔이었다. 인위적으로 빨리 핀 매화는 오래가지 못하고 저버리니, 시들은 흔적이 가슴을 아리게 하였다.
며칠 지나 다시 농원에 가보니 팥알 같던 꽃눈은 흰 콩알만큼 커지는가 했더니 벌써 꽃망울을 터트렸다. 콩알이 부풀어 이내 하얀 눈송이로 피어난 것이다. 한 그루의 나무에도 남쪽 가지에는 꽃이 빨리 핀다. 조금 늦게 핀 꽃이 먼저 핀 꽃을 샘내는 듯하다. 농원은 함박눈 천지로 변하고, 꽃향기 머금은 미풍은 얼굴을 간질인다. 매화나무 가운데 서서 새싹이 움트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니 나도 한 그루 나무가 된다. 가만히 꽃을 들여다보니 노란 수술에는 수많은 희망의 낱알이 박혀있고 매화 송이 송이에는 얼마 전 성당에서 본 파지수집 할머니의 웃는 얼굴이 포개어졌다.
눈앞에 펼쳐진 봄의 향연이 사색에 빠지게 한다. 눈을 감고 지나간 몇 년을 반추해본다. 직장을 잃고 실의에 빠져 있을 때 기다리던 봄이 오는 소리를 들을 수도 볼 수도 없었다. 황량한 겨울 들판은 영원히 봄이 오지 않을 성 싶었다. 벌거벗은 채 겨울을 보낸 나무는 계절이 바뀌면 새 옷으로 갈아입고 꽃을 피우는데, 내가 맞이할 새봄은 몇 번이나 될까 가늠해보던 날이 어제 같다. 다행히 흙을 만나 땀 흘려 가꾼 농원이 새봄이 풋 냄새와 넘치는 생기를 느끼게 해주니 감사할 따름이다.
현란한 색깔로 치장한 장기 한 마리가 까투리를 유혹하고, 어디선가 꿀벌이 날아들어 웅성대는 가운데 아직 봄은 수줍은 듯 모습을 감추고 있다. 가까운 날, 매화 만개하면 겨우내 보지 못한 친구들을 불러 들차 모임이라도 가져야겠다. 청매원의 봄은 내 가슴에 온통 푸른 물을 들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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