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년찻집 / 윤승원
백 년 전쯤에도 나는 이곳에 앉아 있었겠다. 어쩌면 백 년의 백 년 전쯤이거나 그 백 년의 백 년 전쯤이었을지도. 울긋불긋 융단을 깔아놓은 시월의 토함산이 고스란히 창 안으로 들어온다. 격자무늬 차탁에 앉아 나는 창밖, 단풍으로 물든 서어나무며 화살나무들을 본다. 은은한 차향처럼 가을이 깊어졌다. 바람이 불자 나뭇잎들이 훌쩍 지상으로 뛰어내린다. 그런데 왜 나는 이곳 백년찻집에 혼자 덩그마니 앉아 있는 것일까.
찻집은 경주보문에서 감포 가는 길 추령재 산마루에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다. 아스라하게 동해바다가 보이고 바로 아래는 까마득한 산비탈이다. 추녀 끝이 버선발처럼 살짝 치켜 올라간 기와집의 분위기는 고요하고 그윽하다. 휴게소였던 곳이라 사방의 풍광이 단연 빼어난 이곳은 등산로에 연해 있어 사람들의 왕래가 잦다. 주위를 둘러보니 다들 짝을 이룬 연인들이다. 갑자기 내 곁 빈자리가 어스름처럼 쓸쓸해졌다.
차향이며 목조건물에서 풍기는 나무냄새 때문일까? 약간은 몽환적인 실내 분위기에 빠져들어 있는 동안 찻잔이 내 앞에 놓인다. 찻집 주인은 밴 년을 달이느라 늦었다며 애교 있는 너스레를 건넨다. 백년차는 산약, 숙지황, 천문동, 당귀 등 열두 가지의 약재로 우려낸 것이라는 걸 금방 알 수 있었다. 나는 차를 받아들고 옹달샘 같은 그 안을 가만히 들여다본다. 찻잔 속에서 가을이 깊어가고 있었다. 한 모금 마셨더니 금방 몸이 따뜻해진다. 창밖으론 새털구름이 흘러가고 나는 구름 위에 앉은 듯 몽롱해진다.
찻잔의 허리를 가만히 그러모아 쥔다. 손바닥 안에 들어온 백 년이 따뜻하다. 찻잔에 박힌 구절초 꽃잎이 화르르 피어난다. 백 년 만에 피어난 꽃들이 기지개를 켠다. 백년찻집에선 모든 게 백 년이고 창밖 개밥바라기별도 백 년이다. 백 년은 깊고 멀고 백 년은 유장하고 아득하다. 나는 백 년을 잠시 영원이라 이름 붙여본다. 영원을 한 모금 마신다. 내가 영원이 된다.
출입문 소리가 들릴 때마다 고갤 들어 살펴보지만 내가 아는 얼굴은 없다. 그때서야 내가 누군가를 간절히 기다리고 있음을 안다. 내가 기다리고 있는 사람은 백 년 전의 나일까? 아니면 백 년 전의 나를 사랑한 사람일까? 문득 무영탑의 설화로 알려진 아사달과 아사녀의 사랑이 생각난다. 왜에 붙들려간 남편을 기다리다 돌이 된 박제상의 아내, 선덕여왕을 향한 자귀의 그칠 줄 모르는 사랑도 떠오른다. 그들도 모두 백 년을 기다리는 아픈 사랑을 했으리라. 어느새 테이블이 없을 정도로 실내는 가득 찼다. 저들도 지금 백 년 전의 사람을 만나 차를 마시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가 맞은편에 앉아 백년차를 마시고 있다. 키 큰 서어나무처럼 근육질이면서도 날렵해 보이는 체격이 어디서 본 듯한 얼굴이다. 언제 어디서 봤을까? 백 년 전쯤일까? 아니면 백 년의 백 년 전쯤일까? 가끔씩 편안한 미소를 보내기도 하고 손을 흔들어 무슨 말을 하는 것도 같다. 들릴 듯 말 듯 하여 그의 말을 마중 나가보지만 둔한 내 귀는 차탁만 맴돌다 돌아오고 만다. 가까이 다가가고 싶지만 몸이 움직이질 않는다. 우리는 백 년 만에 만났다고, 아니 백 년의 백 년 만에 만났다고 그가 말을 하는 듯하다. 나는 마음속으로 백 년이라는 시간을 꼽아본다. 찻잔 속으로 홀연히 그가 사라진다. 눈을 들어보니 맞은편엔 빈 차탁만이 휑뎅그레하다.
백 년이란 이름이 붙여진 것들은 모두가 아련하다. 선인장의 한 종류인 백년초, 백 년 만에 꽃이 핀다는 용설란, 마르케스의 『백 년 동안의 고독』, 백 년의 사랑, 백 년정류장 등. 이렇듯 백 년은 시간을 한정하는 개념이 아니라 그것을 초월하는 무한의 의미일 것이다. 우리가 지평선, 우주, 영혼이라는 말을 할 때처럼 백 년이라고 말하면 멀고 아득하고 그리운 감정들이 가슴속으로 쏴! 하고 밀려오는 것이다.
하루가 멀다 하고 신상품이 쏟아지고 어제는 금방 과거가 되고 만다. 사람들은 즉흥적이며 순간의 가치에 환호한다. 더 이상 미래를 꿈꾸지 않고 현재만을 향유하는 물질만능의 시대를 살고 있다. 영원이라든가 영혼이라는 말은 사전 속에서나 찾을 수 있는 고어가 되었다. 그래서 백 년이라는 말이 더 애틋한 감정을 불러일으키는지도 모르겠다.
백 년을 가슴에 품고 찻집을 나선다. 어느새 소금을 뿌려놓은 듯 총총하게 별들이 떴다. 은하 같은 정원에도 불이 켜지고 사위는 우주의 모퉁이에서 고즈넉한 저녁이 된다. 돌 틈 사이 등불처럼 피어난 산국의 향기가 바람결에 은은하다. 누구든 가슴에 백 년을 간직하며 살아가리라. 그것은 사랑하는 연인이기도 하고 평생을 소원하는 꿈이기도 하고 지상에서 이루지 못하는 피안의 세계이기도 할 것이다. 그런 백 년이 없다면 만날 사람은 언제든 만난다고 한다. 내가 기다리는 그도 그럴 것이다. 백년찻집은 세상사에 바삐 쫓겨 찾던 내게 마음 속에 저 밑바닥의 영원에 대해서 잠시 얘기를 들려준 것이리라.
정원의 작은 연못 위로 놓인 다리를 건너 백 년 이쪽으로 건너오며 나는 백 년 저쪽의 찻집을 돌아본다. 촛불들로 수놓아진 찻집이 어둠 속에 풍등처럼 떠 있다. 다리를 건너면 다시 현실로 돌아가야 한다. 돌아가고 싶지 않아 몇 번이고 멈춰 서지만 떠나야 다시 만남도 있지 않겠는가? 쓸쓸한 저녁 같은 나를 위로해본다. 얼핏 내가 두고 온 자리에 누군가 등을 보이며 서성이고 있다.
혹, 소금기를 끼치며 바람이 분다. 그는 내가 오기 직전에 다녀갔거나 내가 떠난 직후 이곳에 당도할지도 모르겠다. 아니 그보다 더 오래, 백 년 전쯤이었거나 어쩌면 백 년 후일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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