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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세상/좋은수필 2

[좋은수필]팔순 어머니와 화장품 / 정목일

팔순 어머니와 화장품 / 정목일

 

 

 

`어버이의 날'에 남들이 부모님의 가슴에 카네이션 꽃을 달아드리는 것을 보고, `그까짓 꽃 하나 달아드리는 것이 무슨 의미냐?'고 생각하곤 했다. 열일곱 살에 아버지를 여위고 홀어머니 밑에서 자라온 나는 남들이 일년마다 의례적으로 꽃을 달아드리는 행위를 남사 스럽게 여겨 내 손으로 카네이션 꽃을 달아드리지 못했다. 아들과 딸들을 시켜 할머니에 게 꽃을 달아드리도록 했다.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어버이의 날이 다가오면, 이제 카네이션 하나 달아드릴 분이 이 세상에 안 계신다는 것이 허망하고 눈물겨울 뿐이다. 부모님이 살아 계실 적에 효성을 다하라 하였건만, 그러지 못하고 돌아가시고 나서 한탄한들 무슨 소용인가. 어버이날에 꽃 하 나를 달아드리는 이 형식적이고 평범한 일이 얼마나 소중하고 행복한 일인가를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나서야 알게 된 것이 너무나 억울하게 생각된다.

 

어머니께서 돌아가시기 2년 전 어느 토요일, 일찍 귀가하는 길에 우연히 노모(老母)와 만났다. 어머니는 아파트단지 내에 있는 노인당으로 발걸음을 하시는 모양이셨는데 나를 보자 무척 반가워 하셨다. 집밖에서 어머니와 단 둘이 조우한 것은 드문 일이기도 했다.

 

나는 84세 어머니의 손을 잡고 근처에 있는 백화점으로 갔다.

 

대여섯 살 적 어느 화창한 봄날, 어머니의 손을 잡고 공원으로 꽃구경을 간 기억이 떠올랐다. 팔랑팔랑 춤추는 나비처럼 깡총깡총 뛰면서 나들이를 할 때, 향긋한 꽃내음이 어머니의 화장냄새와 함께 풍겨왔다. 아, 세월이 흘러 대여섯 살이던 아들은 어느새 50대가 되었고, 아름다우시던 어머니는 주름 진 팔순 할머니가 되어 앞으로 몇 년이나 더 살게 될 지 예측할 수 없었다.

 

나는 다시금 옛날로 돌아가 대여섯 살의 아들이 되어 휘바람을 날리며 깡총깡총 뛰면서 나들이 가는 듯한 기분에 빠졌다. 어머니께서도 기분이 좋으신지 연신 나를 보며 웃고 계셨다.  

『어디로 가느냐?』  

어머니는 의아롭다는 듯이 물었다.  

『 어머니! 오늘, 갖고 싶은 걸 다 말씀하셔요. 무엇이든 사드리겠어요.』  

50대가 되도록 어머니에게 이런 말을 해본 것은 처음이었다. 살기에 바쁘다는 핑게, 내일에만 빠져, 어머니에 대해 관심과 정성을 쏟지 못하고 있었다. 나는 어머니와 처음으로 단 둘이서 백화점에 오게 된 것에 기분이 고조되었다. 대여섯 살 적에 어머니의 손을 잡고 공원으로 봄나들이를 가던 그 기분이었다.  

『어머니, 뭘 사드릴까요? 비싼 것도 괜찮아요.』

 

나는 어머니의 어떤 요구라도 응할 마음이었다. 어머니는 나를 물끄러미 쳐다보시며 계면적게 웃으시기만 했다.어머니께 선물을 사드릴 수 있는 기회도 과연 몇 번이나 될 것인 가. 어머니는 망설이다가 부끄러운 듯 미소를 띄시며 말했다.  

『얘야, 화장품을 사고 싶구나.』

 

팔순 노모의 입에서 `화장품'이란 말이 나올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던 일이다. 그러나, 어머니가 아무리 노인이라 할지라도 여인임이 분명했다. 어머니께 한 번도 화장품을 사드리지 못한 일이 부끄럽게 느껴졌다. 옷가지나 생활용품을 사드렸지만 어머니와 연관 하여 「화장품」이란 낱말조차 떠올려 보지 못했다. 어머니께서도 거울을 보며 화장을 하고 싶어 하는 한 여인임을 왜 미처 깨닫지 못하였을까. 아름다움을 간직하고픈 본성을 절대로 놓칠수 없는 여인이라는 걸 늦게야 알게 된 것일까. 어머니에 대한 무관심이 지나쳤음이 가슴을 아프게 했다.

 

47세에 홀몸이 되신 후 4남매를 바라보며 일생을 보내셨다. 그동안 얼마나 외롭고 적적하셨을까. 궁핍한 살림살이 속에서 4남매의 치닥거리에 온 관심을 기울이시느라 어머니께선 화장하는 모습조차 자식들에게 보인 일이 없었다.  

『노인이 쓸 가장 좋은 화장품을 주세요!』

 

어렸을 적에 보았던 젊고 어여쁜 어머니의 모습이 떠오르고, 어쩌면 장수하시겠다는 생각이 들어 휘파람이 솔솔 나올 듯했다. 여인은 늙는다고 하여도 미에 대한 갈망을 버릴 수 없다. 그것은 영원히 간직하고픈 꿈일 것이다.

 

어버이날이 돌아온다고 해도, 하늘 아래 한 송이 꽃을 달아드리고 화장품을 사드릴 분이 계시지 않는 것이 한탄스러워 먼 하늘을 바라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