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지 / 조현태
우연한 기회에 편지를 보았다. 고운 편지지에 직접 쓴 편지를 사진으로 찍은 것이었다. 비록 그림이지만 편지지에다 펜으로 적은 편지를 보는 것이 얼마 만인가 싶었다. 군에 가는 바람에 사귀던 여자 친구와 연락이 끊어졌다면서 여자 친구가 다니던 학교로 날아든 편지였다. 여자 친구의 주소라도 알면 어떻게든 찾아보려는 간절한 내용이었다. 이런 편지를 보면서 불현듯이 고등학교 시절이 생생하게 되살아난다.
?Student Times?라는 학생 전용 신문이 있었다. 같은 학급 친구가 그 신문에 자신의 이름과 주소가 나왔다면서 자랑을 했다. 펜팔을 원한다는 내용의 엽서를 그 신문사에 여러 번 보냈는데 결국 성공했다는 것이다. 며칠 후 그 친구에게 여학생의 편지가 왔는데 나에게 그 답장을 써 달라고 조르기 시작했다. 남의 편지를 내가 쓸 수가 없기에 자기소개와 아울러 주변 정황을 쓰라고 일러 주었다. 편지 교환에 성공하게 되자 친구는 아예 여학생의 편지를 보여 주며 계속해서 답장을 부탁했다. 친구가 보채는 것도 끈질겼지만 여학생의 편지를 읽어 보는 재미도 있어서 대수롭지 않게 승낙했다. 친구는 내가 쓴 편지를 항상 자신의 필체로 다시 써서 보냈다.
몇 달을 그렇게 하다 보니 뭔가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마치 내가 여학생과 편지를 교환하는 사람이라는 착각이 들었다. 내 편지에다 친구의 이름과 필체로 보내지는 것이 싫을 정도였다. 이럴 바에야 차라리 그 신문에 내 이름을 올리자. 내 이름과 필체로 직접 여학생과 펜팔을 해 보자. 그런 생각이 들자 주소와 이름만 실어 달라고 하기보다 학교 소개도 해야겠다는 마음이 얼른 들었다. 쇠뿔도 단김에 빼랬다고 엽서가 아니라 편지지에 부산의 소개와 학교에 관한 자세한 내용을 적어 신문사에 보냈다.
신문사에 편지를 보내 놓고도 감감무소식이라 거의 잊어 갈 즈음이었다. 학교에서 돌아와 자취방에 들어서면서 깜짝 놀라고 말았다. 방문을 여는 순간 방바닥에 커다란 편지 뭉치가 놓여 있었다. 연탄가스 때문에 열어 둔 봉창 너머로 던져 넣은 편지가 족히 서른 통이 넘었다. 편지는 전부 여학생들이 보낸 편지였다.
그 많은 편지에 일일이 답장을 하려니 걱정이 앞섰다. 아무리 생각해도 하루에 삼십 통이 넘는 편지를 직접 쓴다는 것은 방학 숙제를 하루에 다 하는 것보다 어려웠다. 상대 여학생에게는 대단히 미안한 일이지만 한 통의 편지를 쓰고 나머지는 똑같이 베껴서 보내기로 했다.
그것도 엄청난 시간이 필요했기 때문에 쉽지 않았다. 꼬리가 길면 밟힌다고 했던가. 워낙 여러 사람과 여러 차례 편지를 교환하다 보니 내용이 점점 더 어색하게 되었다. 성의 없게 느껴지는 것은 지극히 당연했을 것이다. 건성건성 쓴 편지는 정이 가지 않아 답장도 하기 싫었을 것이다. 한 달도 넘기지 못하고 편지 왕래는 거의 끊어지고 말았다. 무엇 하나 대충대충 해서는 될 일이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확실히 깨닫게 해 준 경험이었다.
가르침은 배움의 반이란 속담처럼 남의 편지 써 주던 덕으로 마지막 남은 한 학생과는 무려 사 년 동안 편지를 주고받았다. 부산에서 동두천까지 편지와 함께 사진이나 책을 선물로 주고받던 때를 생각하면 지금도 기뻐지는 마음이다. 고적대 지휘봉을 들고 화려한 복장으로 시가 행진을 하는 그녀의 모습은 내게 천사와 다름없이 자리 잡고 있었다. 그녀와의 펜팔은 내가 고등학교도 졸업하고 사회에 진출했을 때까지 끊어지지 않는 고리로 남았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우연히도 내가 다니던 직장이 인천으로 옮겨 가게 되었다. 근무처와 동두천이 가깝게 되자 그녀를 한번 만나고 싶다는 생각이 깊어졌다. 어느 봄날, 동두천으로 가겠다고 전화를 했다. 그녀는 휴일이 더 바쁜 날이라며 난색을 표했지만 점심시간을 이용해서 잠깐 차 한 잔 나눌 시간이면 된다고 했다. 두근거리는 가슴을 달래 가며 그녀가 근무한다는 자동차 운전 학원 근처에 도착했을 때는 점심시간이 임박했다. 근사하게 점심 대접을 해야겠다는 마음으로 식당부터 눈여겨봐 두고 사무실로 가서 면회를 신청했다.
깃털 꽂은 모자와 화려한 고적대 복장 대신 직원 유니폼이 그녀를 감싸고 있었다. 귀엽고 깜찍한 여학생이 아니라 윤기가 흘러넘치는 발랄한 처녀였다. 오빠라는 호칭에 매료되게 했던 동생은 온데간데없고 성숙한 여인이었다. 말을 건네기가 사뭇 조심스러웠다. 지금까지 그녀에게 하던 말투는 꼬리를 내리고 나도 모르게 경어가 그녀 앞에서 서성거렸다. 마침 점심시간이니 식사하러 가시겠느냐는 내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직원은 구내식당에서 먹어야 하고, 퇴근 전에는 밖으로 외출할 수 없다?는 소리가 들렸다. 그녀 옆에서 지켜보고 있던 남자 직원의 소리였다. 그녀는 남자 직원과 잠시 안으로 들어갔다가 멀뚱해진 나와 함께 사무실을 빠져나왔다.
커다란 가로수 밑에 마련된 벤치에 나란히 앉았다. 그녀의 설명은 이러했다. 지금까지 그랬듯이 오빠가 여동생에게 점심 먹자고 했으면 괜찮았을지도 모르는데, 정중하게 말한 것이 그 남자의 견제를 받게 된 동기라고 했다. 비로소 남자 직원이 그녀의 남자임을 알고 고별의 악수를 해야 했다. 미리 봐 둔 식당을 멀리하고 인천으로 돌아오는 길은 갈 때보다 훨씬 더 먼 길이었다.
차라리 만나기를 기다리기만 하면서 애틋해할걸. 만나지 말고 서로 마음만 전하며 반가워할걸. 예쁘고 발랄한 그녀에게 당연히 애인이 있으리라는 현실을 알지 못하고 아름다운 여동생으로 덮어 둘걸. 기다리다가 받아 보는 편지였기에 더욱 애틋했나 보다. 감추지 못하는 현실보다 적절히 가리는 베일 속이 더 아름다웠나 보다. 집배원까지도 반가운 사람이었는데.
대문에 매달린 우편함이 푸대접 신세를 받고 있다. 휴대폰의 문자 메시지가 미미하게나마 편지를 대신하는 요즘이다. 그나마 달갑지 않은 광고성 메시지 때문에 반가운 감정마저 가물거리며 꺼져 간다. 어두운 등불 앞에서 꼭꼭 눌러쓰던 편지가 그립다.
'수필세상 > 좋은수필 2' 카테고리의 다른 글
[좋은수필]강바닥을 찾아서 / 정성화 (0) | 2014.11.03 |
---|---|
[좋은수필]낙타 / 김점숙 (0) | 2014.11.02 |
[좋은수필]싸리꽃 / 조병화 (0) | 2014.10.31 |
[좋은수필]이사 / 피천득 (0) | 2014.10.30 |
[좋은수필]청마의 쾌족 / 홍억선 (0) | 2014.10.2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