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빛 연가 / 김재희
뜨겁게 타오르는 모닥불과 화려한 불꽃놀이가 한창인 놀이마당에 달빛도 자리를 같이했다. 모닥불을 가운데 두고 한참 어우러진 시간에도 간간이 눈길을 잡아끌었다. 앞에서 행해지는 시와 노래의 축제보다는 등 뒤로 쌓이는 달빛에 더 마음이 기울어져 행사장 끝자락을 맴돌고만 있었다. 행사가 끝나고 숙소를 향하던 발걸음이 머뭇거리고 있었던 건 결코 뒤풀이하는 자리에 미련이 있었던 게 아니었다. 온몸에 내려앉은 달빛이 놓아주질 않았다. 먼지처럼 털털 털어 낼 수도, 보자기로 꽉 싸매 버릴 수도 없는 달빛에 마음이 묶여서 뭔가에 끌려가듯 발길을 돌리고 말았다. 호젓한 곳을 찾았다. 문명의 흔적이 없는, 오로지 달빛만을 품고 안을 수 있는 장소를 찾아 나섰다.
가로등 하나를 뒤로 제치고 박꽃이 피어 있는 언덕을 지나서 다리 하나를 만났다. 다리를 사이에 두고 앞과 뒤가 다른 세상이었다. 잡다한 불빛들은 뒤로하고 달 쪽을 향해 시선을 고정시켰다. 다른 불빛 한 점 없이 순전히 달빛만으로도 참 환하고 밝다. 얼마 만에 보는 순수한 달빛인가. 실로 오랜만에 느껴 보는 정갈하고 청량한 감정에 신선함을 느낀다.
다리 난간에 어려 있던 달빛이 싸늘한 기운에 떨고 있다가 사람의 체취에 온기를 느꼈는지 옷자락에 성큼 옮겨 앉는다. 그 달빛이 정겨워 가만히 옷자락을 쓸어 보자 다시 손등으로 옮겨 온다. 손등에서 손가락으로, 치맛자락으로, 구두 코끝으로, 그렇게 한참을 달빛과 숨바꼭질을 했다.
갑작스런 사람의 발걸음 소리에 잠시 멈춘 풀벌레 소리가 다시 울리기 시작했다. 높고 낮은 벌레 소리가 고요를 더욱 고요하게 만든다. 때론 소리가 있어 더 깊은 정적으로 몰입하게 되는 경우가 있다. 겨우 들릴 듯 말 듯한 아주 약한 소리는 주위가 더없이 고요함을 느끼게 해 주기 때문이다. 그 정적을 깨는 것이 있었다. 바람에 흔들리는 나무 그림자가 마음을 허비적거렸다. 귀청으로 들리는 소리보다 눈에 보이는 움직임이 마음을 술렁이게 하여 잡음을 일으켰다. 귀로 듣는 정적, 눈으로 보는 소음. 엉뚱하게도 그런 그림을 그리고 싶었다.
점점 더 통통하게 여물어져 가는 달빛으로 내 몸짓을 그려 보았다. 순간순간 다른 생각을 이어 가며 움직일 때마다 표정을 그려내는 그림자. 때론 가벼운 희열로, 때론 아릿한 아픔으로, 때론 입술을 깨무는 앙칼짐으로 뭉쳐져 있던 내 내면의 얼룩들이 배어 나왔다. 무엇이 더 큰 얼룩인지 분간하기 어려운 그만그만한 것들이 발자국을 뗄 때마다 하나씩 그림자에 보태어졌다. 머리칼 끝에 매달려서 대롱거리기도 하고 어깨선 둘레에서 미끄러져 내리기도 하고 소매 속으로 숨어 들어가기도 했다. 그렇게 달빛이 묻은 곳 어디로든 내 삶의 흔적들이 묻어 나왔다. 좋든 싫든 내가 안아야 할 내 흔적들. 그것들이 풀벌레소리와 함께 허공에 메아리쳐 나가면서 초가을 밤은 깊어 갔다.
달빛은 특별히 누군가를 선별해서 교감을 이루지는 않는 듯싶다. 묵묵히 밤하늘을 기울다 자기를 향해 올려다보는 이들에게는 아낌없이 정을 주는 것 같다. 끌고 당기며 정을 나누던 자리에 두꺼워진 달빛이 텃세를 부릴 때쯤, 떠나고 싶지 않은 마음을 달래면서 천천히 뒷걸음쳤다. 그러다 행여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면 그냥 그대로 털썩 주저앉아 버리고 싶다는 내 생각을 달빛은 몰랐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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