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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세상/좋은수필 3

[좋은수필]어머님의 사진 / 박영덕

어머님의 사진 / 박영덕 

 

 

 

시어머님이 거처하시는 방은 사진으로 도배가 되어 있다. 돌아가신 시아버님의 사진을 필두로 51녀의 결혼사진 하며, 손주들의 백일사진 등, 고만고만한 액자에 넣어져서 서열순으로 걸려 있다. 그것들은 결코 좁지 않은 방을 거의 한바퀴 둘러 있어서 보는 사람마다 사진으로 도배를 했다고 웃음을 머금곤 한다. , 어머님에게는 두어 권의 사진첩이 있는데 그 중 화제성이 으뜸인 것은 열아홉 새색시 적에 동네 아낙들과 찍은 사진이다.

 

어느 봄날, 떠돌이 사진사가 동네에 들어왔다. 반가 마을을 자처하던 동네 어른들은 생면부지 남자 앞에서 방실거리며 사진을 찍는다는 것은 망측스런 일이라 했다. 그러더니 산 너머 뉘 댁이 사진을 찍은 다음날로 바람이 나서 종적을 감췄다는 그야말로 바람 같은 뜬소문을 앞세워 추상같은 호령이 내려졌다. 그러나 감추는 사람이 열이라도 훔치려고 작정한 사람 하나를 못 당하는 법, 그 중에서도 통(?)이 큰 아낙 다섯 명이서 보리쌀 두 되씩을 추렴하여 사진을 찍게 되었다. 그들은 어른들의 눈을 속이고 뒷산 대밭에 모여 저마다 머리에 동백기름을 바르고선 사진사가 시키는 대로 포즈를 잡았다. 옆 사람 뒤로 자신의 몸을 반쯤 포개고 한 손으로는 옆 사람의 팔꿈치를 가볍게 붙들라는 사진사의 주문을 긴장하는 탓에 너무 꽉 잡아서 몇 번의 NG를 내기도 했다. 드디어 카메라의 셔터가 눌려지려는 찰나가 되었는데 아뿔싸! 였다.

 

어떻게 눈치를 챘을까. 시아버님께서 한달음에 쫓아와서는 턱 하니 사진사의 뒤에 버티고 서는 게 아닌가. 아버님의 부릅뜬 눈에 놀란 어머님은 질겁을 하여 눈을 딱 감은 채 찍히고 말았으니. 그 사진 때문에 시할머님으로부터 두고두고 통 큰 며느리로 낙인이 찍혀 마음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는 어머님이시다.

 

, 그래도 동네에선 우리들이 지금 말로 치자면 신세대였다. 다른 이들은 마음은 굴뚝 같으면서도 겉으로만 순종하는 척 내숭을 떨었지만 우린 직접 행동으로 옮겼었다구.”

 

그런데 언제부터인지 어머님의 사진첩 속 사진들이 점점 줄어들고 있다. 언젠가는 친구분들과 찍은 사진들 중, 이미 유명을 달리한 분들 것을 들어내시더니 다음에는 당신 혼자 찍은 사진들을 거의 다 정리해 버리셨다. 두고 보자고 찍는 게 사진인데 왜 그러시냐는 내 물음에  

나 죽고 없으면 누가 보겠니, 그저 세상에 다녀간 흔적으로 두어 장 남겨 두면 족하지.”  

하셨다. 송구스런 생각에  

후에 자손들에게 대물림하지요.”  

했더니 자손들이 버젓이 융성해 있으면서도 산소들이 묵어 쑥밭이 되는 세상인데 사진인들 소중히 간직하랴 하시면서 천덕꾸러기 되기 전에 없애 버렸노라고 했다. 자연 숙연해져서 분위기를 좀 바꿔 볼 요량으로  

어머님, 그래도 그 통 큰 사진만은 꼭 제게 물려주셔야 해요. ?”  

졸랐더니  

그건 더욱 안 되겠다. 그 사진 남겼다가 흉까지 따라붙으면 손들한테 망신밖에 더 하겠니!”  

하며 웃으셨다.

 

그래도 어머님이 소중히 간직하시는 사진이 두 장 있다. 하나는 열일곱에 혼인하면서 찍은 사진이고 하나는 사십대 초반에 시아버님과 찍은 사진이다. 찔레꽃이 흐드러지게 피어 있는 어느 산사에서 아버님이 어머님의 어깨를 다정스레 감싸고 찍은 것인데 결혼사진보다 오히려 이 사진을 더 아끼시는 것 같다. 옛날 사진이라 크기도 작고 또 낡아서 돋보기를 쓰시고도 이리저리 찬찬히 들여다보시는 게 안쓰러워 어느 날 사진을 들고 나가 크게 확대해다 드렸더니 어린애처럼 좋아하셨다. 남편에게 그 얘기를 했더니 생전의 아버님께서도 제일 좋아하시던 사진이라고 했다. 그러고 보면 간혹 어머님께서 그 사진을 대하실 때면 발그레, 안색에 홍조가 퍼지는 것 같았음이 나의 착각만은 아니었나 보다.

 

며칠 전에는 어머님께서 하실 얘기가 있다며 나를 부르셨다. 환갑 되던 해에 잔치는 안 했어도 사진이라도 한 장 찍어 두자 할 줄 알았는데 몇 해가 흘렀어도 어느 자식 하나가 입도 뻥긋 안 한다며 심히 서운해 하시는 것이었다. 그 해 초, 미국에 있는 시동생이 신부감을 데리고 들어와 갑자기 잔치를 하게 되었고 가을에는 둘째 시동생의 결혼식을 만부득이 치르게 되어서 죄송스럽게도 어머님의 회갑잔치를 고희 때로 미루게 되었다.

 

이곳 저곳 알아보았더니 시내에 있는 M사진관이 인물사진을 잘 찍는다기에 모시고 가서 찍어 드렸다. 사진이 나오는 날, 어머님은 아들들 다섯을 다 부르시더니 그 사진을 한 장씩 건네주시며  

나 죽은 뒤에라도 없애지 말고 꼭 간직하거라.”  

하셨다. 손바닥만한 사진보다는 가로세로가 삼십 센티도 넘는 큰 사진으로 남겨 주시는 게 더 오래 간직할 것 같아 그러시나 보다 생각했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다음날 찾아오신 친구 분과의 대화에서 내가 얼마나 생각이 짧은 사람인가를 새삼 깨닫게 되었다.

 

곰곰 생각해 보니 지금이 꼭 적기더라구. 죽어서 초상 칠 때 쓸 사진 말이야. 더 젊어서 찍으면 민망스러울 게구 더 늙으면 얼마나 보기 싫겠어. 자식들에게 나 죽어서 쓸 사진 찍을련다, 하면 선뜻 그러자고 하겠어? 그래서 괜히 죄 없는 큰며느리 데려다 야단을 좀 쳤지. 나는 그저 한 장만 뽑으랬더니 규정이 다섯 장이래. 그래서 자식들 집에 한 장씩 나누어 주었어. 나는 말야 상가에 망인 사진이 변변치 못하면 왠지 그 자식들까지 변변치 못해 보이더라구.”

 

어머님 가시고 난 후에 그 사진 쳐다보며 가슴 칠 일이나 장만하지 말아야 할 텐데 걱정이 앞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