굴림에 대하여 / 김덕남
오래 전부터 굴러가는 것들의 위력에 대해서 생각이 맴돌고 있다. 88올림픽 때 8살 소년이 굴렁쇠를 굴리던 장면이 종종 떠오르기도 한다. 넓은 주경기장 가운데로 굴렁쇠를 굴려 갈 때 넘어질까봐 조마조마했던 기억이 있다.
굴렁쇠! 누구나 한번쯤 굴려 보고 싶었을 것이다. 굴렁쇠를 굴리는 의미가 세계 평화와 동서양의 화합을 소망하는 퍼포먼스임을 알고 감탄했다. 아마도 88올림픽 이후부터, 굴리는 것의 위대한 힘이 젊은이들을 열광케 한 것은 아닐까. 작은 골프공, 야구공, 축구공, 배구공 등등. 작은 골프공이 홀에 빨려드는 순간 세계를 제패하는 어린 낭자들의 신기는 참으로 놀랍다. 제멋대로 굴러 가려는 작은 물체에 온 정신을 모아 기도하듯 뽑아내는 성취는 기적이 아닌 굴러 가는 자성(自性)과의 싸움이다. 둥근 것의 우월성은 끊임없는 도전을 부른다. 둥글다는 것은 민첩성과 유연성으로 쉬지 않고 도전을 하게 한다. 평면은 안주하고 안전하다면 둥근 것은 발전적이고 진취적이다.
나는 구르는 것들의 관성(慣性)을 이용하거나 정지시킬 줄을 모른다. 나에게는 평면적인 내성이 잠재하고 있는지 모른다. 굴러가지 않는 것들이 거의 없을 만큼 눈만 뜨면 바퀴들을 굴려야 살아가는 현대사회에서 나 스스로 굴러가게 하는 능력이 없다.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승용차를 쌩쌩 굴리는 것을 보면 나도 한번 신나게 달리고 싶은 욕망이 일어난다. 집에 차가 있어도 나에겐 무용지물이다. 간혹 진작 운전을 익혀 두지 않은 것을 후회하기도 한다. 15년 전 면허증 취득 할 때의 스릴이 아직 생생한데 장롱 속 녹색 면허증은 주인을 원망하고 있을 것이다.
굴려야 부자가 된다는 펀드라는 것도 무용지물이다. 서울에 가는 친구는 대박을 터트렸다고 자랑하는 목소리에 힘이 실렸다. 분명 어깨에 힘이 생겼을 것이다. 나도 한번쯤 구경하고 싶었다. 어느 날 증권회사에 들어가 보았다. 전광판에는 붉은 글시 파란 글씨가 떴다 지워졌다 눈이 부셨다. 구석자리에서 구경 좀 하려는데 가만두지 않는다. “어떻게 오셨어요?”, “무엇을 안내해 드릴까요?” 돈 있는 초보쯤으로 보였던 모양이다. 아무튼 재미있는 별천지였다. 이곳에 오래 있다가는 지갑까지 잃을 것만 같아 되돌아 나오고 말았다. 밖에 나와 혼자서 한참 웃었다. 잠깐 달나라에라도 다녀온 기분이다. 돈도 굴려야 부자가 된다고 하는데 마음 따로 몸 따로 도저히 있을 곳이 못 된다 싶었다. 다시는 올 곳이 아니란 결론을 내렸다.
전광판을 보고 돈을 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는다. 도박 같은 행운을 바라는 인내심이 놀랍다. 나라의 경제가 그들이 굴리기 나름이라니 그들 군단이 나라 경제에 일조를 한다는 말인가. 굴리는 재주가 없기는 그곳에서도 매 한가지니 설 곳이 못 된다고 손을 들고 말았다.
살아가는 데는 의식주가 필요하다. 이것을 유지하고 잘 살기 위해서는 부를 굴리고 차를 굴리고 머리를 굴려야 한다는 것은 누구나 다 아는 일이지만 재주가 없는 사람은 애당초 안 굴리는 것도 사는 길이지 싶다. 타고난 분복대로 적게 쓰고 아끼며 살아가는 지혜도 필요하다.
구르는 세상 속에서 내가 가장 싫어하는 말이 있다. 잔머리 굴린다는 말이다. 잔꾀, 잔머리, 말 돌린다, 말만 바꾼다, 말만 비단이다…. 말을 굴리며 말장난 치는 사람은 진실성이 없어 보인다. 상대방을 무시한다고나 할까. 자기 말에 속아 줄 것으로 착각을 하고 군림하는데, 사실은 속이 다 보인다는 사실을 알기나 아는지 모를 일이다. 말이 투박하고 앞뒤가 잘 맞지 않아도 속마음은 상대가 알아주게 되어 있다.
굴리는 일에 재주가 없음에도 굴러가는 것들에 얹혀 세상구경하길 좋아하여 무료한 오후 시간에 골목골목 다니는 마을버스에 오른다. 낯선 골목길에는 생동감이 넘쳐나고 잔잔한 인정이 보인다. 그곳에는 평온한 일상이 엿보인다. 정신없이 굴러가는 도심보다 소박한 그런 마을이 마음을 편안하게 해 준다. 삶의 잔잔한 즐거움을 찾아 종종 마을버스에 몸을 실어 볼 일이다.
요란하게 굴러가는 세상에 떨어지지 않으려면 한눈팔지 말고 잘 붙들고 얹혀 가야 한다. 얹혀가자면 내가 오히려 안전하지 않을까.
'수필세상 > 좋은수필 3' 카테고리의 다른 글
[좋은수필]UFO / 정경자 (0) | 2015.06.17 |
---|---|
[좋은수필]바다의 묵시록 / 강호형 (0) | 2015.06.15 |
[좋은수필]과속(過速) / 이동렬 (0) | 2015.06.13 |
[좋은수필]매화, 육백 년을 살다 (0) | 2015.06.12 |
[좋은수필]그해 석 달 / 유혜자 (0) | 2015.06.1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