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총히 떠나가는 시간 속으로 / 허경자
연초에 숨겨 놓았던 삼백예순다섯 날의 존재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앞만 보고 달리다 보니 어느새 머리는 성성해지고 칠흑 같던 머리엔 흰 눈이 내리고 있다. 혼자 매달려 있는 캘린더의 마지막 장이 칼바람처럼 차갑기만 하다.
연말이 되고 보니 후회가 많다. 좀 더 부지런히 살지 못했던 것에 대해, 좀 더 따뜻하게 지내지 못했던 것에 대해 아쉬움만 밀려든다. 조금만 더 밀어붙였더라면, 조금만 더 현명하게 처신했더라면 지금보다는 더 나을 수 있지 않았을까.
미련하게도 나는 해마다 같은 후회를 되풀이하며 자책을 반복하고 있다.
허탈함에 집을 나서 본다. 물밀 듯 쏟아져 나온 인파의 행렬과 원색의 몸짓으로 유혹하는 네온사인의 물결, 벌어지는 세밑 풍경이 속절없이 차가운 겨울을 달구고 있다.
인파에 떠밀려 밤거리를 배회해 본다. 인파 속에 몸뚱이를 맡기고 의지와는 상관없이 어디로든 흘러가 본다. 흥청거리는 무리 속에 끼어 이어지는 발자국을 따라가 보지만 여전히 공허하고 고독하기는 마찬가지다.
세월은 잘도 가지.
흔적 없는 바람처럼 야속하게도 떠나 버리지.
무수한 찰나 속에 뿌려 놓은 수많은 삶의 편린들이 하나의 점으로 잔존해 온다. 가슴을 눌러 댔던 갈등 속의 관계들이 아득하게 멀어져 간다. 섬을 떠나야 섬이 보인다는 시인의 말처럼 고스란히 한 해를 탕진하고 나서야 새삼 세월을 돌이켜 보고 있다. 일 년 중 하루를 마무리할 수 있는 저녁은 수백 번이나 있었는데 한 달이라는 기간을 되돌아볼 기회도 열 번이 넘게 있었는데…….
나는 막바지에 다다르고 나서야 하루를 곱씹으며 반추의 의미를 되새기고 있다.
현재의 자기 모습이란 전적으로 자신에게 달렸다. 오늘 이 순간 눈앞에 펼쳐진 나의 삶이란 나의 위치란 지난 과거에 내 스스로 결정한 모든 실행의 총합체이다. 굳이 ‘성취 심리’란 ‘브라이언 트레이시’의 말을 빌리지 않더라도 우리 모두에겐 무엇이든 원하기만 하면 선택할 수도 있고 실천할 수도 있는 자유가 보장되어 있다. 만약 내가 어떤 일을 해냈다면 그것은 결국 내가 선택하고 행동했기 때문이며 다행히도 그 결과가 좋았다면 그것 역시 다른 사람이 아닌 내가 부단히 노력했기 때문이다. 결국 지금 나는 과거의 내가 선택하고 과거의 내가 행동한 것에 대한 또 다른 결과물인 것이다.
그런데도 나는 지난 일 년을 합리화시킬 수 있는 핑계 거리를 찾고 있다. 언제 가 버렸을지도 모를 세월의 무정함을 원망하며 허탈해하고 있다. 그동안의 게으름은 솔직히 시인해야 한다. 방만했던 습관들도 냉정하게 내버려야 한다. 그렇지만 나는 아직도 어줍은 변명으로 자신을 미화하고 이루지 못한 목표에 대한 미련으로 밤잠을 설치고 있다. 손쉬운 행복이란 없는 것을, 치열한 도전만이 현존할 뿐인 것을.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저마다 다른 빛깔을 내며 살아가는 각각의 삶은 어쩌면 불변의 생일지도 모른다. 이미 절대자의 각본 속에 정형화되어 있는 그림 같은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다가오는 새해에는 어둠을 탓하기보다 한 자루의 촛불을 켜고 싶다. 현재의 내 모습이 과거의 선택에 의해 만들어진 것처럼 미래의 내 모습은 지금의 나에 의해 조각될 것이 아니던가.
정신을 차리고 한 걸음 물러서 보니, 총총히 떠나가는 시간 속에 미진하기 그지없는 한 인간이 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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