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수 / 윤승원
시원의 저 깊은 곳에서 뚝뚝 물소리가 듣고 있다. 동굴처럼 깊은 잠에서 깨어나 보니 현관 천장에서 물방울이 떨어지고 있었다. 올봄에 옥상 방수공사를 했는데 어디서 물이 새는 것일까? 물그릇을 받쳐두고 돌아와 누웠으나 좀체 잠이 들지 않았다.
팔순에 든 시어머니는 얼마 전부터 치매 초기 등상을 보였다. 십 년을 치매를 앓다 돌아가신 시아버지를 간호하신 시어머니였다. 당신은 절대로 정신을 놓으며 추하게 살지 않겠다고 다짐했던 터였다. 마음을 굳게 다지고 운동과 식이요법으로 관리를 잘한 편이었다. 그러나 자신도 모르게 세어나가는 정신은 잡을 길이 없었던 모양이다. 자꾸만 집에 도둑이 들었다 하고, 아이들의 이름을 잊어버리는가 하면 밥 먹고 금방 돌아와 배가 고프다고 했다. 정신도 몸의 일부분이라 그런지 치매가 시작되고부터 조금씩 야위어 갔다. 저러다 말년엔 정신을 놓고 사신 시아버지 상태까지 가면 어쩌나 벌써부터 걱정이 태산이다.
시어머니는 소방공무원이셨다. 시아버님과 만나 4남매를 두었다. 작은 키에 목도 짧고 못났다고 시아버지의 타박이 잦았다고 한다. 거기다가 시할머니의 매서운 시집살이까지 모질게 견뎌야 했던 것이다. 그럼에도 커가는 자식들을 보며 다 참아 낼 수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공무원 퇴직금으로 시작한 시아버지의 목재 사업은 경험미숙으로 전 재산을 탕진하고 말았다. 그 결과 술로 세월을 사신 시아버지는 시어머니께 온갖 원망을 다 부려놓았다고 한다. 결국 시아버지는 알코올로 인한 치매로 말년을 허무하게 보내셨던 것이다. 평생을 일군 재산과 남편을 함께 잃어버린 시어머니의 말년도 치매라니 어처구니가 없는 것이다.
치매라는 말은 라틴어의 ‘정신이 없어진 것’이라는 데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뇌기능이 손상되면서 이전에 비해 인지 기능이 저하된 상태를 말한다. 기억력, 언어 능력, 판단력 및 일상생활이 어렵게 된다. 그래서 가족이나 전문 요양병원의 도움을 받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시어머니는 요즘 조금만 걸어도 숨을 헐떡이며 힘들어 한다. 그런데도 만나기만 하면 집에 가서 살고 싶다고 한다. 심신을 구속하는 요양원을 벗어나 자유롭게 살고 싶은 것이다. 남편을 여윈 후로 바람처럼 지낸 분이니 오죽할까. 응석 같은 투정을 달래고 진정시키느라 진땀을 뺀다. 온천욕을 시켜드리고 좋아하는 회도 사드리면 아이처럼 좋아한다. 헤어질 땐 이제는 오지마라고 하면서 눈엔 눈물이 그렁그렁하다. 엄마와 헤어지기 싫어하는 어린아이 같다. 햇빛에 그을지 않아 뽀얀 피부며 밭일 하지 않아 손도 예뻐졌지만 가둬두었다는 죄책감에 며느리로서 마음이 아프다.
무슨 기념일 때마다 받은 꽃을 버리기가 안타까워 거실에 자주 놓아둔다. 이른바 드라이플라워는 자신의 몸속에서 조금씩 수분이 빠지며 말라간다. 시들어가는 꽃잎이 안타까워 물을 뿌려보지만 그것도 잠시, 싱싱하던 꽃잎들은 푸석해지고 줄기는 딱딱해져 간다. 야위어가면서 꽃들은 무슨 생각을 할까 그것이 궁금했다. 이젠 더 이상 놔둬도 쓸모가 없다 싶어 버릴 때쯤엔 꽃들은 손 안에서 형체도 없이 바스러졌다.
치매 또한 일종의 누수일 것이다. 집이 낡아 물이 새는 것처럼 몸의 노화로 생기는 현상이기 때문이다. 시간의 흐름 앞에서 만물은 다 퇴락한다. 사는 동안 우리는 갖가지 누수를 겪으며 살아간다. 알게 모르게 주름이 깊어가고 등이 굽어지고 안구건조증으로 눈이 뻑뻑해지기도 하는 것이다 어디 인간들뿐이겠는가. 꽃과 나무들로 시간이 지나면 시들고 만다. 만화방창의 시절이 지나면 추풍낙엽의 시간이 오는 것이다. 이처럼 세상의 사물들은 모두가 저 나름대로의 누수현상을 가지고 있다. 집의 누수, 꽃의 누수, 사람의 누수. 그러니 누수현상을 안타깝게 생각할 것이 아니라 그걸 인정하고 받아들일 줄도 알아야겠다.
시어머니의 누수에서는 여러 가지 것들이 빠져나가고 있을 것이다. 아내로서 남편으로부터 한 번도 제대로 된 사랑을 받지 못했던 일이며, 그런 남편의 술주정이며, 사업실패며, 자식들의 불화며, 시어머니를 짓눌렀던 고단들이 빠져나가고 점점 더 가벼워지고 있는지도 모른다. 채로 불순물을 거르듯 그러면서 행복했던 순간들만 남아 있었으면 좋겠다. 연지곤지 찍고 시집가던 순간이며, 첫아들을 얻은 때, 자식들의 결혼이며, 손자들의 재롱이며, 그러고 보니 시어머니의 얼굴은 쭈글쭈글해졌으나 표정은 오히려 맑아보였다. 저렇게 가벼워져서 당신은 드라이플라워처럼 흔적도 없이 바스러지리라. 삶의 모든 기억을 다 내보내고 난 뒤.
요즘은 내 몸에서도 누수현상이 일어나고 있다. 외출을 할 때나 운동을 할 때면 느닷없이 새어나오는 요실금이다. 세월 앞에선 장사 없다더니 지천명의 나이를 넘어서려니 조금씩 노화현상이 나타나는 것이다. 얼굴에 주름살이 생기고 눈꼬리가 처지기 시작했다. 가까운 지인의 이름을 잊기도 하고 금방 무슨 일을 했는지 생각나지 않는 길이 잦다. 매사 의욕이 없고 덩달아 마음까지 울적해진다. 노화가 가져오는 누수현상이리라.
전문 배관업자를 불러 현관누수의 원인을 찾았다. 물탱크의 호스연결 부위 고무패킹이 느슨해져 있었다고 한다. 교체를 하고 나니 더 이상의 누수는 없었다. 나는 다시 깊고 편안한 잠을 자게 되었다. 힘든 일이겠지만 내게 일어나는 시간의 누수현상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기로 했다. 그러고 나니 몸과 마음이 새털처럼 가벼워졌다. 누수가 일깨워 준 새로운 삶이다. 내일은 요양원에 계시는 시어머니께 다녀올 예정이다. 똑똑 물새는 소리가 나는 시어머니의 영혼 앞에서 한나절을 어린애처럼 웃고 지내다 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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