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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세상/좋은수필 3

[좋은수필]파이터 / 손훈영

파이터 / 손훈영

      

 

 

휑한 불빛 아래 한 사내가 검은 샌드백을 치고 있다. 두 개의 눈동자는 세상을 뚫을 듯 집요해 보인다.

 

세상에 대한 증오로 폭력에 절어 살던 한 남자가 권투를 통해 인생을 배운다. 가진 건 두 주먹 뿐, 맨 주먹으로 거친 삶을 밀고 나간다. 화면 가득 번지는 어둡고 막막한 열기가 고스란히 마음에 와 닿는다. 권투 영화는 언제 봐도 비장하다.

 

내가 링에 오르게 되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선택하고 말고 할 경기가 아니었다. 떠밀리듯 링 위에 서게 되었다. 치밀하게 전략을 짜볼 겨를도 없었다. 어리둥절한 채 글러브가 끼워지고 마우스피스가 물려졌다.

 

링 아래에는 삼삼오오 짝을 지은 많은 사람들이 웃고 떠들고 있었다. 공이 울리면 지옥문에 돌입해야 하는 나의 긴장에는 아랑곳없어 보였다. 두려움에 포박당해 막막한 나와는 달리 그들은 영원히 링 위에 설 일은 없을 것 같은 생기 있는 얼굴이었다. 그들에게 시합은 무미건조한 일상에 하나의 활력소가 되는 무엇일 뿐이었다.

 

일 라운드가 시작되었다. 상대는 막강한 놈이었다. 상황 판단이 채 서지 않은 나를 향해 최초의 일격을 날려 왔다. 이제 겨우 시작이었을 뿐인데 내 몸은 단 번에 바닥으로 나가 떨어졌다. 강력한 지진에 강타당한 목조건물과도 같이 맥없이 무너졌다. 입 안에서 피가 터지고 머리카락은 뭉텅 빠져 바닥에 흩어졌다. 뼈가 이지러지고 내장이 뒤틀렸다.

 

굵고 억센 줄로 아퀴 지어진 사각공간은 말 그대로 출구 없는 방이었다. 링을 장악한 그 놈의 펀치는 가히 살인적이었다. 피부는 까맣게 타들어가고 사지는 전기고문을 당하는 듯 오그라들었다. 빈틈이라고는 보이지 않는 거대한 놈이 빠른 잽을 날리며 엉겨오는 사각 링은 되돌아 갈 수도 뛰어 내릴 수도 없는 천길 만길 낭떠러지였다.

 

정신이 혼미한 중에도 한 가지 생각만은 또렷했다. 이것은 내 몸을 담보로 하는 시합이라는 것이었다. 이 경기에서 이겨야만 앞으로 얼마간의 삶이 보장된다는 사실이었다. 죽음으로 배수진을 친 경기였다. 감당해 내기에는 너무도 잔인한 무엇이었다.

 

링 바닥에 흥건한 땀방울 때문에 몇 번이나 미끄러지며 이, 삼 라운드가 이어졌다. 살 수도 죽을 수도 없는 진퇴양난의 시간이 시합 내내 이어졌다. 내 힘만으로 치러 낼 수 있는 경기가 아님을 직감했다. 시커멓게 죽어가는 입술로 운명을 관장하는 그 누군가를 애타게 불렀다. 내 몸에게 간절히 부탁했다. 제발 견뎌 달라고 기도했다. 흰 수건만은 내던지지 말아 달라고 애걸했다.

 

후반전으로 갈수록 내 몸이 생각보다 먼저 움직이기 시작했다. 팽팽하게 조여 오는 링 위에서 정작 필요한 것은 생각이 아니었다. 안이하게 생각으로만 살던 링 아래서의 방식을 가차 없이 버려야 했다. 경기에 이기기 위한 전략으로 생각은 이미 느렸다. 부정확하고 불완전했다. 오히려 혼란만 가중시키기도 했다.

 

단지 몸의 말만을 들어야 했다. 더 효율적인 방어와 공격은 몸이 먼저 가르쳐 주었다. 오직 몸의 말을 새겨들어야 할 뿐이었다. 조금치의 틈만 보여도 여지없이 날아드는 상대방의 펀치와 더불어 나는 아주 단순해졌다.

 

혼신의 힘을 다해 무너지는 두 다리를 움직였다. 쭉쭉 잽을 날려 상대를 밀어냈다. 밀어 낸 그 만큼은 안전해졌다. 팔꿈치를 몸에 붙이고 가드를 올렸다. 턱을 바짝 당긴 자세로 풋워크를 하며 계속 주먹을 피했다. 홀딩과 주먹 피하기를 번갈아 하며 삐져나오는 신음을 앙다문 이 사이로 짓이겼다. 서서히 상대는 지쳐갔고 드디어 마지막 라운드가 끝났다. 승자도 패자도 가늠할 수 없는 피투성이 난투전 이었다.

 

사각 링 위에서의 한 판 승부는 회복할 수 없을 정도의 상처를 남겼다. 두 팔은 부종으로 퉁퉁 부어올랐고 한 가닥의 머리칼도 남지 않은 알머리는 멍처럼 푸릇했다. 그러나 잔혹했던 그 시합이 상처만 남긴 것은 아니었다. 링 위에서의 처절한 승부는 어쩌면 죽을 때까지 얻지 못했을 투혼을 나의 유전자에 아로 새겨주었다. 삶의 변방에서 어정거리고만 있던 우유부단한 나를 단번에 생의 한가운데로 옮겨놓았다.

 

삶이 링 위에서의 피할 수 없는 승부라는 것을 인식하기 전 나는 아마추어 선수조차도 아닌 그저 빌빌하는 룸펜에 지나지 않았다. 배짱이나 근성 같은 내적 힘이 전혀 없었기에 산다는 일은 언제나 미궁이었다. 온갖 마취적 위로로 하루하루 연명하는 무책임한 나날이었다. 살아 있으되 살아 있는 시간들이 아니었다. 삶을 향한 투지나 지구력 같은 방패가 있었더라면 암이라는 창이 내 몸을 뚫지 못했을 거라는 후회가 절절한 눈물을 흘리게 했다.

 

암은 앎이다. 앎은 삶을 고양시킨다. 배수진을 친 링에서의 승부는 안이한 마음으로는 보이지 않던 많은 것들을 볼 수 있게 해주었다. 링에서 내려오고 난 뒤 내 삶을 지지부진하게 하는 많은 것들을 정리해버렸다.

 

이제 비로소 단단한 끈기와 힘, 투박한 배짱 같은 것들이 내 안에 자리 잡는 듯하다. 그것들은 열정의 다른 이름이다. 지금까지의 내 인생에서는 기미조차 없었던 것들이다. 그런 것들이 없어 한 번도 승자가 되어보지 못했다는 통렬한 회한이 입을 앙다물고 앞으로 나아가게 한다.

 

링 위에서건 링 아래서건 안전한 곳은 단 한군데도 없다. 다음 번 경기가 언제 열릴지 아무도 모른다. 경기의 두려운 기억일랑 잊은 듯 평화로운 어느 날 밤, 불현 듯 다시 죽음의 링에 오를지 누가 알겠는가. 어쩌면 경기와 경기 그리고 그 사이의 휴지기로 이루어진 것이 앞으로 내 삶일지도 모른다.

 

아마추어로는 어떠한 경기도 치러 낼 수 없다. 독한 훈련도 없이 링에 올랐다가 또 다시 그 지옥을 겪을 수는 없다. 프로 선수가 되어야만 한다.

 

땀에 전 티셔츠와 헝클어진 머리카락이 이제 나의 존재방식이다. 새벽의 달리기와 천 번의 줄넘기로 세상을 대적한다. 뛰는 심장과 뜨거운 숨소리로 차가운 세상의 문을 두드린다. 불안이라는 검은 굴레를 향해 빠른 잽을 내민다. 두려움이라는 허깨비를 향해 어퍼컷을 날린다. 불안과 두려움이 저 멀리 나가떨어진 자리에 살아있음의 기쁨이 오롯이 반짝이고 있다.

 

입술은 근성으로 다물려지고 눈동자는 투지로 빛난다. 나는 파이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