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제도 답도 모를 때 / 김진식
아침신문을 읽다가 번쩍 정신이 들었다. ‘문제도 답도 모를 때는 인문학으로 풀어라’, 삼성전자와 레고를 성공시킨 컨설팅 회사의 메시지라면 여간 뜻밖이 아니다.
모르는 것을 찾아내는 일은 복잡한 자료나 과학이 아니라 원하는 것이 무엇이며 그 삶의 눈이 되어 반응하는 것을 찾아내는 것이라고 한다. 이런 인문학의 기저에 하이데커의 현상학(現象學)이 있다니 뜻밖이다.
합리적인 방법론에 의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을 제쳐두고 생명의 근원을 살피며 찾아내는 것이다. 미리 물음을 만드는 것은 도움이 되지 않는다. 좋아하는 것이 무엇인가 보다 왜 좋아하는가를 알아야 하기 때문이다.
이런 발상은 근원적인 것이긴 해도 합리성과는 거리가 있으며 더욱이 무슨 변증법이니 하는 사회과학과는 어긋난다. 이는 인간이란 합리적인 개인이 아니라는 데서 출발하고 뿌리에 축적된 전통과 이에 깃든 생명력이 어떻게 적응하는 것인가를 살펴가며 문제를 알고 답을 구한다. 인문학은 이처럼 개량화된 것이 아니고 주어진 환경에 따라 다른 모습을 보여주는데 여기에서 문제와 답을 찾아낼 수 있다는 것이다.
글을 쓰면서도 이런 비슷한 생각을 할 수 있다. 어떤 글을 쓸 것인가에 대한 것보다 왜 글을 쓰는가에 대한 물음을 던질 수 있다. 어떤 글은 나름대로 수준이나 조건을 내세워 답을 구할 수 있지만 왜 글을 쓰는가에 대해서는 스스로의 삶에서 찾아야 한다. 어떤 글에는 대상과 조건을 설정할 수 있지만 왜 글을 쓰는가에 대해서는 스스로의 삶에서 찾아내어야 한다.
그러므로 무슨 글을 쓸 것인가에 대해서는 구체성을 보일 수 있고 그 결과물로 수준을 드러내지만 왜 쓰는가에 대해서는 자신의 지향성에서 찾아야 하므로 스스로의 의지에 따라 지어간다. 그러므로 ‘ 왜 쓰는가’의 답은 나에겐 자신을 위해서이다. 목마름을 축이거나 투사(投射)하며 존재를 확인하기 위해서이다. 여기에는 과학도 데이터도 통하지 않는 미묘한 생명력이 숨 쉰다. 글이 곧 사람이라는 것도 같은 맥락으로 이해된다.
나는 동료 문사들과 ‘왜 쓰는가’에 대해 의견을 나눌 때가 있지만 제각각이다. 독자와 만나기 위해서도 쓰고 시대정신과의 동참을 위해서도 쓴다. 그리고 나처럼 자신의 녹을 담아내기 위해서도 쓴다. 이런 주장에는 나름대로 명암이 갈린다. 독자와 영합하거나 유행을 좇거나 이념의 전사(戰士)가 된다면 인문학도 발을 들여놓기가 여렵다. 뿌리가 없거나 제 뿌리가 아니기 때문이다.
나는 내 글쓰기의 해답을 구하기 위하여 다시 아침신문을 펴들고 인터뷰 기사를 읽고 있다. 경영을 모르지만 모르는 문제와 답을 인문학으로 풀 수 있다니 반갑다. ‘문제도 답도 모르면 인문학으로 풀어라’ 선문답(禪問答)인듯 이해가 어렵지만 감이 좋다.
나는 지금 인문학이란 자리를 깔고 글쓰기에 골몰하며 ‘문제도 답도 모르는 것’을 찾고 있다. 삶의 뿌리에서 숨을 고르니 기별이 오는 듯하다. 글쓰기는 이런 생명력으로 존재의 의미를 그려가는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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