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 시절 / 김경
아침부터 경쾌한 노랫소리가 울려 퍼진다. 한 때 이름을 날렸던 가수가 통기타를 치며 자신의 히트곡을 부르고 있다. 텔레비전을 보다가 나도 모르게 거울 앞으로 달려가 리듬에 맞춰 몸을 흔들어 본다. 일명 투스텝 춤이다. 두 손을 위로 찌르고 허리를 한껏 젖혀 엇박자로 스텝을 밟는다. 소싯적에 그토록 춰 보고 싶었던 발랄 경쾌한 댄스를 얼마 전 여행길에서 배웠는데 그 익숙한 노래가 아침부터 나를 거울 앞에 서게 한 것이다.
세상은 돌고 돌아서 그 옛날 동무들과 다시 조우하게 만들었다. 수십 년 각자의 삶을 살다가 돌아왔건만 시간 여행이라도 한 듯 중간 인생은 싹둑 잘려나가고 그 시절의 연장선상인 듯 과거를 탐닉했다. 우리는 서로에게 타임머신이었다. 여전히 십대 소녀들인 줄 착각해도 좋을 만큼 서로에게서 소싯적 기운을 끄집어내 주기 바빴다. 결코 늙지 않는 여자인 줄 최면을 걸어가면서 말이다.
친구들은 자신도 모르게 그 시절의 말과 몸짓을 기억해 내고 재현하려 애를 썼다. 아니 저절로 그렇게 되었다고 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공백의 시간을 메우려 날마다 만나고 웃고 떠들었다. 나이를 잊어버리고 싶은 욕구의 발로일까. 누가 보면 주책덩어리라고 하겠지만 우리끼리 즐거우면 그만이었다.
지난겨울, 그들과 여행을 갔다. 발이 아프도록 돌아다니며 자유부인의 기분을 만끽하는가 하면, 바닷가 횟집에서 배를 두드려 가며 술도 한 잔씩 기울였다. 밤이 이슥해서 호텔로 돌아오는데 로비 반대편에서 현란한 간판이 유혹의 손짓을 보냈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우르르 노래방으로 몰려갔다.
어릴 적 유행했던 노래들을 차례로 불렀는데 하나같이 신나는 리듬 일색이었다. 어느 시점부터는 모두가 똑같은 춤을 추었고 분위기에 취해 나도 따라 하기에 이르렀다. 예나 지금이나 몸치인 것은 여전하지만 어릴 때는 부끄러워서 못했던 것을 중년이 되니 그 재미가 쏠쏠했다. 세상천지 무서울 것이 없는 아줌마라서 그런지 춤이 되든 말든 마음대로 흔들다가 우리는 서로의 모습에 배꼽이 빠지도록 웃었다.
한 친구가 일찌감치 이 투스텝 춤을 익혀 읍내 공회당 노래자랑에서 일등 했던 자랑을 늘어놓았다. 그러자 어두운 객석에서 그저 부러운 눈으로 박수나 치고 있었던 내 모습이 떠올랐다. 상품으로 받은 찜통을 엄마한테 갖다 드리니 그렇게 좋아하셨다는데 나도 진즉 용기 내어 배울 걸 그랬다.
어느 신문에서 흥미로운 기사를 읽은 적이 있다. 각 세대의 불특정 다수를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였다.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때는 언제라고 생각하는가?”
젊을수록 행복지수가 높을 것이라는 것이 대다수 사람들의 생각이었다. 결과는 예상 밖이었다. 20대는 젊음과 패기와 희망을 내세워 자신들이 가장 행복하다고 주장했다. 40대야말로 무르익어 가는 연륜과 열심히 일하는 기쁨이 있어 진정 행복하단다. 6,70대의 대답이 가장 의외였다. 자녀를 키우는 의무감에서 해방되고 이제는 휴식기에 접어든 이 시간이야말로 여유롭고 평안하다고 당당하게 말했다. 세상의 뒤편으로 물러난 늙고 힘없는 나이라 비관할 것이란 예상은 완전히 기우였다.
기사를 보고나자 왠지 모를 기쁨이 스멀거렸다. 중년으로 접어든 이 시간이 지나면 서글픈 노년의 삶이 기다리고 있을 것만 같던 막연한 두려움이 사라졌다. 살만한 인생이지 않는 때가 없다는 것은 누구나 다 삶을 소중히 여긴다는 반증이다. 나라고 다르지 않을 것이라는 데 생각이 미치자 지금 이 순간도, 다가올 미래도 행복이 담보되는 것만 같아 모든 것이 긍정적으로 보였다.
그러고 보니 지난 추석 성묫길에서도 그것이 여실이 확인되었다. 트럭 짐칸에 올라탄 숙모님들이 한창 유행하는 노래 `내 나이가 어때서‘를 합창하며 얼굴에 함박꽃을 피우고 있었다. 살짝 장난기가 발동해 정말로 사랑하기 딱 좋은 나이라고 생각하시냐며 짓궂은 질문을 던졌었다. 그분들은 일초의 여유도 두지 않고 이구동성으로 이 얼마나 좋은 나이냐고 대답했다. 무언가에 한 대 맞은 듯 충격과 동시에 한줄기 빛이 마음에 들어와 꽂혔다.
생각해보니 어렸을 적에 느꼈던 어른이 되는 것에의 막연한 두려움도 정작 때가 되고 나서는 망각한 채로 살아왔지 않은가. 그날의 생 앞에서는 그에 맞는 삶을 사느라 행복이니 불행이니 따져볼 필요 없이 그저 내 몫의 인생을 살면 그만이었다. 평범하기는 해도 매 시간이 그런대로 살만했던 것이 아니랴 싶었다. 남은 삶도 또 그렇게 흘러갈 것이라고 생각하니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주어지는 나이 앞에 주눅들 필요가 없다는 결론이 나왔다.
사람 사는 세상에 어찌 즐겁고 기쁜 일만 있을 것인가. 일어날 법한 온갖 일들이 생겨나는 것이 인생이다. 크고 작은 저마다의 고통과 분노, 좌절과 상처를 피해 갈 방법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세대가 스스로 만족감을 갖는 것은 연륜에 걸맞은 용기와 지혜가 따르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그것이 희망이다. 각자의 색깔에 맞는 희망이라는 옷을 입고 살아가는 우리는 언제나 청춘인 것이다.
젊어지려고 발악을 하지 않아도 되겠다. 누군가에게 잘 보이려 스트레스를 유발할 필요도 없다. 그저 곁에 있는 이들과 즐길 거리를 만들어 주어진 시간을 즐기면 되는 것이다. 그 상대는 친구만한 것이 없다. 이들과 함께 있는 동안은 우리 삶은 내내 푸른 시절이니까.
만물이 생동하는 봄이다. 젊거나 늙거나 상관없이 푸른 계절이 모두를 깨어나게 한다. 온 세상에 푸른 물이 번지듯 우리들 마음에도 새로운 기운이 솟아난다. 하늘과 땅 사이에 꽃비가 내리고 지천으로 넘실거리는 푸른빛이 춤을 추게 한다. 거울 속 늙수그레한 여자가 허리를 한 번 꺾을 때마다 십대 소녀의 얼굴이 언뜻 언뜻 스쳐지나간다. 찰랑거리던 단발머리가 비록 푸석한 파마머리로 변했을지라도 나의 생은 여전히 푸르고 아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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