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전범죄 / 원정란
건강 검진을 받았다. 연례행사로 치르지만 매번 신경이 쓰인다.
이번엔 오후, 더 불편했다. 전날 자정부터 금식을 해야 했고, 당일에도 아침, 점심까지 거르니 목도 마르고 배도 고프고 어지럽기까지 했다.
접수하는 아가씨에게 엄살까지 접수시켰다. 내시경과 복부초음파를 먼저 해달라고 부탁했다. 복부 초음파 때마다 번번이 소변량 부족으로 퇴짜를 맞았기에 이번에는 금식 전부터 물을 많이 마셨더니 화장실이 급하다고 사정을 했다. 고맙게도 간호사가 편의를 봐 주었다.
늘 예악시간보다 30분 전에 와서 보란 듯 나보다 먼저 끝내곤 하던 남편, 이번에도 어김없이 부지런을 떨었지만 나를 따라 잡을 수는 없었다. 잘난 척하는, 한심해 나는 모습에 보기 좋게 한 방을 먹인 역주행이었다.
초음파를 먼저 했다. 작년에 갑상선에 혹이 있어 떼어냈는데 이번엔 지방간이라 했다. 체중을 줄이지 않으면 콜레스테롤 약을 먹어야 한다니 한심한 노릇이었다. 미련하게, 쓸데없이 체지방만 잔뜩 달고 오다니. 복부 쪽은 소변량이 넉넉한 덕에 여유 있게, 정밀하게 볼 수 있었다. 아주 깨끗하다며 합격도장을 쾅쾅 찍어 주었다. 화장실에 가도 된다는 허락이 떨어졌다.
소변 컵을 들고 화장실로 달렸다. 일촉즉발, 한숨을 돌리며 변기에 앉았는데 정면에 글씨가 눈에 들어왔다.
‘절대 변기 안에 휴지를 넣지 말아 주세요.’
그것은 눈높이에서 간곡하게 사정하고 있었다.
눈은 글씨의 끝쯤 있는데 습관은 초스피드, 미처 뇌에서 명령할 틈도 주지 않고 휴지를 변기 안에 넣어 버렸다. 아뿔싸? 마음 같아선 손은 넣어 건지고 싶었다. 그러나 저 지조 없는 것은 이미 그 품에 안겨 풀어져 버렸으니. 설마 괜찮겠지. 늘 그랬던 것처럼 세 칸만 썼으니 별일 없을 거야. 어릴 적부터 아버지의 명령대로 작은 것은 세 칸, 큰 것은 여섯 칸. 어쩌나 세뇌가 되었던지 집밖에서도 예외는 없었다. 제발하는 마음으로 물을 내리는데 소리가 수상했다. 꾸륵꾸륵. 누군가 막힐 조건을 만들어 놓았고, 결정적으로 빈약한 휴지 세 칸이 걸린 것이다. 꼼짝없이 범인으로 몰리게 생겼다. 억울했다. 걱정을 매단 채 화장실을 나왔다.
위 내시경을 하기위해 앉아 있는데 간호사사 우언가를 적은 종이를 들고 지나갔다. 무심코 봤는데 ‘수리 중 어쩌구 저쩌구’라고 적혀 있었다. 순간 변기구나 싶었다. 어니나 다를까 뒤 따르던 청소부 아줌마가 골 난 소리를 했다.
“아니, 누가 또 변기 안에 휴지를 버린 거야?”
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
잠시 후, 범인이 범행 장소를 둘러보듯 화장실로 가 보았다. 발걸음이 떨렸다. 내가 야용했던 화장실 문 앞에 섰다. 예상대로였다.
수리 중, 불편을 드려 죄송합니다.
쪽지가 붙어 있었다. 청소부 아줌마가 셜록홈즈처럼 나를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그러나 물증은 없고 심중만 있는 아줌마, 걸레질이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나는 애꿎은 손만 씻고는 돌아 나왔다. 뒤통수가 따가웠다. 다시 들어가 이렇게라도 둘러대고 싶었다.
‘사실은 저 한글을 못 읽으므니다.’
무거운 마음으로 검사를 계속했다. 대장내시경을 끝냈더니 자꾸 가스가 나왔다. 장 청소를 위해 먹은 약 때문인 것 같았다. 근데 강도가 점점 세져 소리를 감당할 자신이 없었다. 어쩔 수 없이 다시 화장실을 찾았다. 여전히 아줌마가 있었다. 그 담백함이 범인은 이미 잊었는지 이번엔 족집게 도사라도 된 듯, 이미 상황을 다 알고 있다는 듯 큰소리로 말했다.
“걱정 말고 뿡뿡 뀌세요.”
“아, 네.”
비록 아까는 확신을 못했지만 이번만큼은 틀림없다고 다그쳤다.
“다들 그런다니까. 어서요. 창피해하지 말고.”
“그럼 실례지만….”
남들도 다 그런다기에 나는 체면 불구하고 맘껏, 원 없이, 시원하게 발포를 해냈다. 그리고는 흐뭇해하는 아줌마를 행해 좀 과장되게 웃었다. 그 뒤로 굳게 닫힌 화장실문이 입을 앙다물고 침묵하고 있었다.
결국 나는 ‘범인’이였음을 자백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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