쑥 / 임억규
우리 집 뜰에서 자라는 쑥을 보는 사람 거개가 한마디씩 한다.
“쑥이 있네!” 이 한마디가 풍기는 뉘앙스가 때마다 사람마다 다르다.
안양에서 농장의 꿈을 가꾸고 있을 적에 기르던 정원수 몇 그루를 옮겨올 때에 흙덩이에 올라타고 따라온 놈들이다. 뜰 한편에 심어진 지 열 다섯 해가 되었다.
쑥이란 놈은 생장력이 어찌나 드센지 더위니 가뭄도 모르고 뿌리를 뻗어 잔디밭까지 넘본다. 그대로 두었다가는 뜰이 온통 쑥으로 덮일 것 같아 호되게 만류를 해도 끈질기기가 막무가내다. 철도 없고 눈치도 모르는 것일까. 하기사 씨에서 태어날 때의 솜털을 평생 버리지 못하고 제 꽃마저도 드러낼 줄을 모르는 놈이 쑥이 아니던가.
뉴욕에 사시는 사촌누님 내외가 오셨을 때 뜰에서 기르는 쑥으로 ‘쑥국’을 끓여 드리겠다고 했더니 반가워하셨다. 농약 공해로 구수한 쌀뜨물을 잊은 지 오래이니 고향의 쑥국 맛을 겨우 흉내나 냈을까. 그래도 옛정을 곁들인 아침 식사는 즐겁기만 했다. 누님의 향수병을 달래는 데도 쑥이 효험을 보였으리라.
쑥은 몸을 보양하고 식욕을 돋운다며 쑥국을 즐겨 하시던 아버지를 비롯, 우리 집 남매는 모두 쑥국을 좋아한다. 이른 봄, 마른 풀잎들 사이로 아지랑이 손길 잡고 기지개 켜며 돋아나는 봄 쑥은 누나들의 도란거리는 이야기를 엿들으며 바구니에 담아온다. 방앗간에서 갓 찧어온 쌀을 뜨물에 잘 삭힌 된장을 풀어 끓인 쑥국은 식구들의 춘곤(春困)을 쫒아주고 입맛을 돋운다.
요즈음은 별미로 먹는 쑥국, 쑥떡, 쑥범벅이지만 일제 말의 보릿고개에 쑥만큼 우리를 도와준 들풀도 없다. 초등학교 어린이들의 급식에 쌀알이 드문드문한 쑥밥이 등장했었다. 쑥의 수난시대요 배달민족의 수난시대이었다. 쑥 뿌리만큼이나 질긴 목숨이었다. 곰이 인도환생 할 제 백일 간을 견딜 수 있는 힘을 준 한 줌의 쑥, 단군신화가 아니더라도 쑥의 묘력(妙力)을 알만하다.
여름철 대지의 흙냄새와 어우러진 쑥 냄새는 가슴을 파고드는 고향의 냄새다. 살갗에 따끔한 침으로 노곤한 초저녁잠을 깨우는 모기를 쫒으며 이야기꽃을 피우던 밤, 모깃불 연기 자락에 감겨 도는 쑥 냄새에 하늘의 별들도 너울거렸다.
내가 군에 복무 중일 때다. 배앓이를 하던 여름철의 어느 날 아침, 전방 사령부 세면장에서 철모에 쑥을 찧어 그 짙푸른 액을 마셨다. 밤이슬 맞히지 않은 즉석 생즙이라 몹시 쓰고 풋내가 나긴했으나 그 날로 배앓이는 가라앉고 사흘아침을 마시니 입맛도 돌아왔다. 나만이 아는 어머니의 비방인 듯 자랑스러웠다.
초등학교에 입학을 하기 전에 어머니께서 등에 종기가 나서 고생을 한 일이 있었다. 하루는 고통을 참지 못하는 어머니를 보고 누가 시켰을까 논두렁길을 기며 달리며 오리쯤 떨어져 있는 외가로 가서 어머니는 죽는다며 마당에 퍼질러 않자 울어댔다. 그 때 외삼촌이 서둘러 오셔서 어머니께 침을 놓아드리고 또 쑥 뜸질을 해드렸다. ‘토룡(土龍) 뜸’이라는 것이다. 하룻밤 하루 낮의 쑥 뜸으로 통증이 멎더니 삼일 간의 뜸질을 마치고 나서 보니 종기의 균근(菌根)이 파고든 살 속이 개미집 같다. 나중에야 알게 된 사실이지만 토룡의 항균력과 쑥의 해독성이 협동작용으로 지독한 등창을 멎게 한 것이다. 항생제라는 것이 없던 시절이었다. 이 상처를 아물리는 데 서너 달이나 걸렸었다.
그랬던 어머니께서는 여름철이면 온 식구들에게 쑥물을 해먹이곤 하셨다. 들판에서 뜯어온 쑥을 다듬어 씻은 다음 돌확에서 찧어 진한 쑥물을 만들어 사발에 넣고 뚜껑을 덮은 뒤 장독위에서 하루 밤을 재운다. 그러면 쓴맛도 가시고 풋내도 줄어서 먹기가 수월해진다. 여름철에 입맛을 돋우고 배앓이를 예방하는 방법이었다.
아버지도 쑥을 애용하셨다. 라이터가 없던 시절, 성냥마저도 귀했다. 성냥 한 개비의 절약 때문일까. 담배 맛이나 쑥의 효험 때문일까. 긴 담뱃대를 쓰시던 아버지께서는 마른 수리취 잎이나 쑥을 비벼 부싯돌로 붙인 불을 대통 속의 담배에 붙였다. 동화의 한 대목 같은 이야기이다.
쑥은 비타민과 미네랄 등이 많아 인체에 영양과 효과가 있는 것 외에도 해열과 진통, 혈압 강하, 소염, 해독 등의 효험이 있음을 철이 들어서야 알게 되었다. 일제를 겪은 아버지 그리고 형님 세대가 목숨을 부지하고 얼을 잃지 않은 데는 쑥의 효험도 있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해 본다.
광복이 되고 반세기가 흘렀건만 아직도 이 사회는 일제의 병독이 다 가시지 않은 성싶다. 미국의 공짜 밀가루와 설탕 덕에 해독이 되기는커녕 미국병, 유럽병마저 깊숙이 파고들어 합병증세가 중증인 것 같다. 용도에 따라 다르기는 하겠지만 건강을 위해서라면 정력 강장에 좋다며 수입해 온다는 굼뱅이, 불개미, 뱀이나 사슴 뿔 대신으로 쑥을 먹으면 어떨까. 돈 때문에 열이 오르고 감투 때문에 혈압이 오르는 사람들에게도 효험이 있으리라.
뜰에서 자라는 쑥을 본다. 만져도 보고 냄새도 맡아 존다. 부드러운 감촉이 손 끝에 와 닿으며 곰 같고 쑥같이 살아온 가슴팍으로 파릇한 쑥 냄새가 아른히 스며든다.
나는 이른 봄엔 쑥국으로 입맛을 돋우고 여름에는 짙푸른 쑥물로 건강한 추억을 마시고 가을엔 뜰의 마른 쑥을 거두며 아버지의 부싯돌을 떠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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