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처구니 / 이한재
“원 세상에! 이런 어처구니없는 일이….”
요즈음 신문만 펴들면 나도 모르게 나오는 말이다. 단순한 말이라기 보단 탄식이고 한탄이다. 도대체 어처구니가 무엇이기에, 또 어디로 갔기에 이런 말이 저절로 나올까?
손자 정원이가 오늘은 점심을 먹지 못했다고 했다. 할머니가 교회일로 일찍 나가고 할아버지가 가방을 챙겨주면서, 수저를 빠트리는 어처구니없는 실수를 한 탓이다. 어린 녀석이 얼마나 배가 고팠을까? 안타까웠지만 그래도 이 일은 작은 해프닝에 지나지 않는다.
돌아보면 우리 주위엔 이런 어처구니없는 일들이 매일같이 발생한다.
“내 담배 왜 뺏어” 하고 중3 학생이 교감 선생님을 마구 때렸는가 하면, 캠퍼스에서 술을 못 마시게 한다고 데모하는 대학생들도 있었다. 귀순병이 철책을 넘어 우리 측 생활관을 두드리기까지 몰랐던 일과 원자력발전소 안에서 마약에 취한 채 근무하는 정말 어처구니없는 일도 있었다.
왜 이런 ‘어처구니없는 일’이 생길까? ‘어처구니’란 것이 대체 무엇이고 어디로 가버렸는가?
‘어처구니’란 옛날 가정에서 곡식을 갈 때 쓰는 맷돌의 나무 손잡이를 말한다. 한 줌 굵기의 두어 뼘 되는 나무토막을 둥글게 깎아 맷돌 위판의 한쪽에 끼워 쓰는 작고 보잘것없는 부품이다. 그러나 문명의 발달로 맷돌이 사라지면서 어처구니도 사라졌다.
‘어처구니’는 사라졌지만 ‘어처구니없다’라는 말은 아직도 널리 사용된다. 일이 너무 뜻밖이어서 당황스러울 때 쓰는 말이다. 그리고 이때의 ‘어처구니’란 말은 ‘우리의 삶에 꼭 필요한 기본 도리, 즉 최소한의 양심이나 상식’을 말하는 것 같다.
삶에서는 비록 사소한 일이라도 원칙을 지키고 상식선을 넘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그렇지 않으면 어처구니없는 큰 사고가 날 수 있기 때문이다. 삼풍백화점이나 성수대교 붕괴 같은….
맷돌의 손잡이에 지나지 않는 어처구니에게는 또 하나의 기능이 있다. 어처구니는 혼자 사용하기도 하지만, 보통 둘이서 같이 사용할 때가 많다. 그리고 이때 마주 않은 두 사람의 사이를 의좋게 만들어 준다. 사이가 좋지 않다는 고부간도 어처구니를 잡는 순간만은 화기애애해진다.
마주앉아 어처구니 위에다 손을 포개면 미움이 변하여 사랑이 되는 것일까? 한쪽이 밀면 다른 쪽은 당기고, 그쪽이 당기면 이쪽이 밀고…. 이 일은 서로의 마음이 맞아야만 이루어진다.
내 어렸을 때, 할머니와 어머니가 마주 앉아 도란도란 얘기를 나누시며 맷돌을 돌리던 모습이 떠오른다. 그날은 맛있는 콩국수나 콩죽을 먹을 수 있었다. 이와 비슷한 일로 다듬이질도 있었다. 어스름 밤, 마주 앉아서 또드락또드락 돌을 두드리는 소리는 어느 음악에 못지않은 화음이다. 우리의 옛 삶에는 이런 화합의 도구가 많았다.
맷돌이 사라지고 또 어처구니마저 없어지면서 그 화합을 끌어내는 상생의 기운도 사라진 것 같다. ‘같이 잘 살아보자는 생각은 없어지고 나 혼자 잘 되어야 한다.’는 생각만이 팽배하다. 모두가 1등만을 추구하는 사회, 그 때문에 어처구니없는 일이 자꾸 발생하는 것은 아닐까?
투박한 나무로 만들어진 어처구니. 누가 그것을 잡을 때 내 손도 포개 주어야겠다. 아내는 물론, 이웃과도, 교회 성도들이나 같이 공부하는 친구들과도, 나아가 전철에서 만나는 모르는 사람과도 같이 잡아 준다면 우리 사회가 조금은 더 따뜻해지지 않을까?
맷돌의 손잡이라는 도구로서의 어처구니야 이젠 필요 없다. 그러나 삶의 도리로서의 어처구니는 더더욱 요구되는 세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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