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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세상/좋은수필 3

[좋은수필]살아가는 재미 / 조순영

살아가는 재미 / 조순영

    

 

 

또다시 김장철이 돌아왔다. 4대가 모여 오순도순 김장을 하였다. 해남 땅끝마을에서 절임배추와 고춧가루를 보내 주었다. 고추를 사서 손질하여 빻고, 배추를 고르는 일부터 수월치가 않았는데, 따뜻한 햇볕과 해풍에서 자란 절임배추와 고춧가루가 오는 몇 해 전부터 한결 수월해졌다.

재래시장을 오가며 김장거리를 준비하면서 힘들어 하던 때와는 달리 김장을 버무릴 때 큰 아들네 식구 여섯이 모이자 잔칫집이 되었다. 며느리가 네 아이를 데리고 대문에서 긴 마당을 지나 현관으로 들어올 때는 어미닭이 한 떼의 병아리를 몰고 들어오는 것 같아 내 목소리에도 힘이 실리게 된다. 빨갛게 익은 감과, 청홍 단풍나무, 모과나무, 양지와 음지의 하나씩 서있는 무궁화나무, 파란 하늘을 바라보느라 아기들은 걸음이 더디다. 위로 큰손자와 세쌍둥이는 이웃에서 놀러온 고양이와 나뭇가지 높은 곳에서 우짖는 까치 부부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즐거워들 한다. 손자들이 자라면 어떤 할머니네 집으로 기억될까 벌써부터 궁금해진다. 큰손자에게 이 집이 네 아빠와 삼촌과 고모가 자랐던 집이라고 말을 해준다.

따끈한 아랫목에서 꼼짝을 하지 않으시던 어머니도 아이들이 오는 기척이 나자 어느 결에 거실로 나와 뒤뚱거리는 걸음으로 목소리가 높아진다. 아범이 차를 대는 동안, 나는 방에 들어박혀 있는 작은아들을 불러댄다. 삼촌이 보이지 않으면 세쌍둥이는 경쟁하듯 삼촌 방으로 쪼르르 달려가기 때문이다. 이럴 때 남편이 있었으면 얼굴 가득 함박웃음을 띠며 큰손자부터 하나씩 가슴에 품었을 테지만, 여느 날처럼 부재중이다. 바깥일로 바쁜 아버지가 집안일에 등한시한다고 큰아들이 서운해 할 때, 아버지가 우리 곁을 지키는 것만도 고맙게 생각하자고 달랜다. 아들을 넷이나 낳은 일등공신으로서 며느리가 목소리까지 밝고 맑아서 자꾸만 만나고 싶어진다.

딸네 자녀를 키워주는 홀시어머니를 모시고 사는 외며느리 친구가 한 말이 생각난다. “평소에는 방에서 꼼짝도 하지 않는 어머니가 외손녀네 내외가 오면 갑자기 부엌에서 분주해져서 민망하다.”는 말을 듣고 웃음이 나왔다. 외손녀가 드리는 용돈의 힘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단다. 사람은 나이가 들어도 자신의 몫을 다한다는 존재감을 알리려 하는 게 아닐까. 아기들은 하는 짓마다 예쁨과 웃음을 선사한다며 어른들은 지혜로움으로 자기 몫을 하나 보다.

어머니가 연로하셔서 명절이나 김장 같은 일을 할 때마다 내년에도 함께할 수 있을까를 속으로 가늠하는 버릇이 생겼다. 까다로운 입맛과, 나를 가르치고 바른말을 입에 달고 사시는 어머니를 봉양하는 일이 쉽지가 않다가도, 어머니가 내 곁에 계신 것이 고맙기도 하다.

1980년대 말, 제주도에 갔다가 우연히 만난 한 여인의 말만 믿고 현지답사도 하지 않은 채 해남의 바닷가 귀퉁이의 작은 밭 한 뙈기를 샀다. 남이 무슨 말을 하면 나는 그 말을 의심 없이 받아들이는 어리석은 면이 있다. 헌데 별 가치가 없었던 땅이 20여 년이 지난 지금 생각지도 않게 든든한 보물창고가 되었다. 그 동안 농사짓던 분이 병으로 돌아가시고 난 후, 젊은 부부가 그 일을 맡아서 대신하고 있다. 처음에 젊은 사람이 농사를 짓는다고 했을 때 제대로 할 수 있을까 하고 염려가 되었는데 그들은 나의 기우를 불식시켰고, 마음까지 크고 넓어서 풍성한 먹거리를 나누어 주고 있다. 감자와 고구마, 양파즙과 절임배추와 고춧가루 등을 때마다 아낌없이 보내주고 있으니 아무 일도 하지 않고 받아먹어도 되나 싶기도 하다. 그때그때 나는 밭작물을 외지에 나가 있는 가족에게 나누어 주듯 우리에게 보내 주는 고마운 정성으로 올 겨울도 거뜬히 날 것이다. 돈으로 살 수 없는 마음으로 따뜻한 정을 나누며 살아가고 있으니 아무래도 늦게 터진 복인 것 같다. 젊은 날 어리석게 저질러 놓은 일이 뒤늦게 보물창고가 되어 두고두고 기쁨을 누릴 줄 상상이나 했겠는가. 그래서 세상사는 세월을 곰삭도록 묵혀 봐야 일의 성패가 판가름나는 것인가 보다.

핵가족화가 하루가 다르게 속도를 내고, 편리한 것만 추구하는 세상에 가족 모두가 한 자리에서 머리를 맞대고 함께 김장하는 아름다운 정경은 먼 나라 이야기가 되지 않을까 조바심이 든다. 가족끼리 오래오래 오순도순 따스한 정을 나누기를 바라는 일 또한 지나친 욕심일까. 여러 가지 재료가 한데 어울려 숙성시켜야 제 맛을 내 듯, 많은 형제들이 함께 다투며 화해하며 자라는 동안 더불어 사는 법을 배우지 않을까싶다.

김장을 하는 동안에도 손자들은 제각각 다른 모습을 보인다. 김장을 하거나 말거나 고개를 숙이고 게임기만 들여다보는 아이, 노란 고갱이를 먹으며 맛있어 하는 아이, 버무린 김치를 먹고 맵다고 우는 아이도 있고, 우는 아이에게 물을 가져다주는 아이들을 바라보는 할미 마음이 흐뭇해진다.

들은 바는 없지만 해남의 수호천사 아주머니도 자라는 동안 아마도 많은 형제 속에서 나누고 베푸는 기쁨을 터득한 것이 아닐까. 한번 놀러 오라는 정겨운 아주머니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마음속에 아름다운 모습을 그리면서 만나는 기쁨을 미루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