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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세상/좋은수필 3

[좋은수필]늙은 도마 / 강표성

늙은 도마 / 강표성


 

 

시아버님 제사가 여름 휴가철에 끼어있다. 때가 때인 만큼 제수를 준비하는 일부터 남은 음식을 보관하는 일이 만만찮다. 제사를 모시고 난 후, 숨 좀 돌리려는 참이었다.

장아찌 좀 싸주세요!”

땀에 젖은 고무장갑을 벗고 샤워라도 하려는 순간에 시누이의 주문이 날아들었다. 제사 음식도 남아도는 판에 무슨 소리인가 싶었다.

시누이가 몽골로 여행을 떠나는데 장아찌를 싸가지고 갈 모양이다. 그 먼 여행에 웬 장아찌 타령인지 입맛도 별나다. 여행 중에 현지 음식을 맛보는 기쁨이 얼마나 큰데. 속으로 궁시렁 대는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어머니 눈빛이 빛난다. 누구에게 뭐랄 것도 없이 찬광으로 가는 문을 여신다.

어머니는 주방에서 물러나신 지가 제법 되었다. 오십 년 근무하다가 명예퇴직하시고 십 년째 안식년을 보내고 계신다. 그래도 구관이 명관이라고 당신 솜씨를 따라잡기가 힘들다. 특히 무짠지를 썰 때면 노장의 솜씨는 살아있다. 눈동냥으로 안 되는 그 무엇이 있다.

무장아찌는 된장에 절여져서 수분이 빠진 터라 얌전히 썰리지 않는다. 비들비들한 통무를 가지런히 썰어서 다시 채썰기를 하다 보면 칼잡이의 내공이 드러난다. 어머니의 채 써는 솜씨는 한석봉 어머니 저리 가라다. 성냥개비 정도로 썰어진 무장아찌는 당신만의 특허나 다름없다. 한 입 먹어보면 오들오들하고 쫄깃한 게 참 맛나다. 채소가 이리 찰질 수 있을까 싶다.

살아 있네!”

무장아찌를 한 입 넣자마자 시누이가 한 말이다. 두 눈은 벌써 초승달로 변했다.

시누이는 세 아이의 엄마다. 천둥벌거숭이 같은 삼 남매를 기르며 직장생활을 하는 이다. 그런 그녀가 고약한 병에 걸리고 말았다. 어깨를 덮던 긴 머리카락이 뭉텅뭉텅 빠지고, 구토로 반복되는 시간을 보내야했다. 어느 누구보다 싱싱하게 살아야 할 그녀다. 막내딸은 어느 집에서나 꽃이다. 나이가 들어도 막내딸만이 가지고 있는 귀여움과 풋풋함이 있기 때문이다.

젊은 딸이 암에 걸려 고생하는 모습을 지켜보며 어머니는 말을 아꼈다. 냉정할 정도로 침묵했다. 혹시라도 입방정을 떨어 부정이라도 탈까봐서 그러셨나 보다. 대신, 일을 찾아 여기저기 기웃거렸다. 옥수수가 열리기도 전에 텃밭을 서성이고 마늘대궁이 올라오기도 전에 호미를 찾아들었다. 그렇게 몇 년을 헤매고 다니셨다. 팔순을 바라보는 어른이 절로 나오는 한숨을 삭이는 그 심정이 어땠을까 싶다.

도마를 경계로 앉아있는 두 모녀가 오래된 수묵화처럼 그윽하다.

어머니의 둥근 등이 도마의 등과 닮았다. 둘 다 완만한 포물선을 그리고 있다. 한쪽 등은 굽어서 휘어진 것이고 다른 한쪽은 닳아서 없어진 것이지만 오랜 친구처럼 비슷해 보인다.

사람만 나이를 먹는 것은 아니다. 물건도 나이를 먹으면 늙는다. 도마의 정갈한 목리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자잘한 흠결들이 또 다른 무늬를 만들고 있다. 한때 저 도마도 평평하고 깨끗한 처녀목이었을 것이다. 칼자국 하나도 함부로 낼 수 없을 정도로 맑은 나뭇결이었겠다. 이제는 칼날 자국들이 수많은 빗금으로 남아있다. 문지르고 닦아내도 감출 수 없는 세월의 흔적이다.

저 도마는 숱한 칼날을 품었으리라. 제 한 몸 순순히 내놓고 칼을 피하지 않았을 것이다. 자신을 온전히 드리지 않으면 견딜 수 없는 세상이다. 자르고, 다지고, 내려친 과정을 통과한 도마는 순한 짐승처럼 누워있다. 상처와 흔적이 만들어낸 부드러운 등이다. 그 둥근 몸피로 허공을 받치고 있다.

살아 있는 한 누구도 시간의 칼날을 벗어날 수 없으리라. 누구는 난타로 이어지는 시간들을 견뎌낼 것이고, 누구는 단숨에 내려친 일격을 통과할 것이고, 혹자는 살금살금 스쳐가는 칼질에 길들여지기도 할 것이다.

나도 이제 어머니의 도마를 닮아간다. 당신의 손맛은 못 배우고 모양새만 늙은 도마처럼 변해간다. 삶이 던지는 칼날 속에서 내가 얼마나 둥글어지고 있는지 궁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