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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세상/좋은수필 3

[좋은수필]글 쏟아질라 / 이난호

글 쏟아질라 / 이난호



 

 

글 쏟아질라.”

할머니는 내가 읽던 책을 펼친 채 방바닥에 엎어둔 걸 보면 살그머니 그것을 접으며 나무랐다. 나무람 끝에 으레 책천(冊賤)이면 부천(父賤)이라던디.”라고 혼잣말을 했고 무슨 받침거리를 찾아 책을 올려놓는 손길이 공손했다. 일자무식, 평생 흙을 주무르던 그분은 낚시 바늘 모양으로 구부린 꼬챙이를 벽 귀퉁이에 걸어두고 글자가 찍힌 종이쪽을 보는 쪽쪽 거기 끼워 간직했다.

요즘 들어 자주 할머니가 생각난다. 엎어진 책에서 단박 학덕 쏟아짐을 끌어온 그 즉물적인 은유, 책을 천대하는 것은 곧 아버지를 천대함이라 굳게 신앙하던 수더분한 언저리가 그립다.

필진이 도통 눈에 안 차지만 편자(編者)와 얽힌 인연이나 체면 때문에 마지못해 월간지의 정기구독료를 낸다는 사람을 만난다. 그는 잡지가 배달되는 즉시 봉도 안 떼고 쓰레기통에 던진다는 말을 조금치의 가책 없이 했다. 보잘것없는 글 실력으로 툭하면 단행본을 찍어 돌린다며 낯 두꺼운 사람!”이라고 표정으로 말하는 이도 있었다. 여행기에 이르면 한층 입이 험해지는 이들 앞에서 얼뜨기가 된 적이 더 많다. 그들은 먼저, TV로 비디오테이프로 인터넷으로 거기에 전문 서적까지 얼마나 정확하고 친절하냐고 종주먹 댔고, 그럼에도 아직 여행안내서 수준급의 싱겁디싱거운 제 여행기를 읽어내라 짓찧어 맡기는 사람이 안쓰럽지 않느냐고 내게 동의를 강요했기 때문이다. 나는 도리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여행기는 곧 돈 자랑이다대뜸 등치(等値)시켜버리는 단칼질에 비하면 숨 쉴 만했으니까.

머리가 화끈, 눈앞이 아찔아찔했다. 나는 필시 그의 눈에 안 차는 글을 끼적거렸을 것이고 그 실력으로 단행본을 찍어 돌렸으며 여행에서 돌아오면 마치 채무라도 진 듯 기록을 남기려 몸달아했으니 어찌 그들의 칼 겨냥을 비키겠는가. 더 견디기 어려운 건 역시 양심 가책이었다. 나는 저들 칼잡이와 한통속으로 장단 맞추고 덩달아 춤춘 적이 있었다. 만만한 곳에 인정머리 없이 칼을 꽂기도 했고 저자의 서명이 든 책자를 밀어둔 채 잊어버리는 무례를 범했다. 희떠운 소리를 툭툭 흘리면서도 본인은 결코 입맛이 까다로운 사람이 아니고 함부로 남의 글 트집 잡을 주제도 못된다고 내숭떨었다. 얼굴에 이목구비가 있어 가능하듯이 최소한 기본구조를 갖춘 글이라면 안 읽은 적 없다고 생색냈다. 참을성 없는 내가 이쯤 품을 넓혔는데도 눈에 들지 못한 글은 좀 무례한 대우를 받아도 좋다는 말끝에 웃음을 달았다.

역지사지(易地思之), 그 끔찍한 무례, 경거망동을 참회하게 된 건 내 책을 찍어내고 나서다. 정확히는 시원찮은 책 한 권 만드는 데에 저 푸른 숲 속의 아름드리나무 몇 그루나 베어내어야 하는지라는 어느 책의 경구가 얼음송곳이 되어 내 등을 찍었을 때였다. 섬뜩했지만 그럼에도 나는 끝끝내 낑낑거렸다.

저는 아니겠지요.”

저는 아니겠지요.”

당신이 팔아 넘겨지리라는 예수의 예언에 열두 제가 중 유다가 맨 먼저 설친다. 제 발이 저려서 시치미 뗀답시고 속내를 들어 낸 유다는 기실 얼마나 순진한가. 나는 순진하지 않았다. 이번에도 책을 건네며 입에 발린 소리로 부끄러운 글입니다.” 하긴 했지만 속으로는 콧대를 세웠다. 색다르지 않은 여행기를 받으면 투정할 가치도 없다. 가볍게 제껴버렸고 봉도 안 뗀 책들이 쓰레기로 버려진다 해도 남의 일이거니 강 건너 불 보듯 했다.

, 남들도 이렇게 차츰 돌이 되어 가는 걸까.

책과 아버지의 이미지가 절대였던 할머니에게 나의 망동은 결코 용서받지 못할 것이다. 할머니는 봉도 안 뗀 책들이 쓰레기로 버려진다면 이제 세상의 맨 끝 날이 왔다고 가슴 떨며 겨우 말하리라. “책천(冊賤)이면 부천(父賤)이라는디.” 그분의 전율이 나를 통째로 흔든다. 눈물처럼 말간 것이 속에 괸다. ‘푸른 숲을 떠올리면 저도 가슴이 캥겨요. 할머니. 그렇지만 저는 확신해요. 자기 글을 읽히겠다는 욕심 말고 지순한 마음을 나누려는 원()이 담긴 글이라면 연이어 읽히리라는 걸. 그런 책은 어버이만큼 높이 올려짐으로 결코 알맹이를 쏟아버리지 않으리라고 저고 신앙할 참이에요. 할머니.’

책이 천대받고 글이 쏟아지기 전, 매우 안온한 때를 골라 타계한 할머니가 고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