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의 계절과 숙성 / 김진식
숲길을 걷고 있다. 스산한 바람이 지나간다. 낙엽이 흩날리고 숲이 운다. 돌아가는 몸짓이 쓸쓸하고 성근 숲이 허전하다. 지난날을 돌아보며 조용히 살펴본다. 자성(自省)과 관조(觀照)가 머물고 있다. 수필의 마음이다. 이처럼 수필은 스스로 돌아보며 걸러내고 조용히 내면을 꿰뚫으며 깊은 맛으로 제 모습을 드러낸다. 가을의 사색과 겨울의 침묵이 그렇지 않은가.
수필은 반짝이는 감성이나 화사한 겉치레로는 어렵다. 아름답고 매혹적이라도 돌아보는 여유가 없으면 설고 거북하다. 그러므로 수필은 원색의 눈부심이나 설익은 자만으로는 가을의 사색이나 겨울잠에 들 수 없다. 계절의 속성에 따라 혹독한 더위와 추위와 바람과 눈비를 견디며 비로소 맛을 낸다. 이처럼 수필은 한 철의 산뜻한 맛이 아니라 절(節)을 삭이고 나이테를 거듭하면서 숙성된 은근하고 깊은 맛이다.
이 맛으로 인생을 이야기하고 수필의 여운을 아끼게 된다. 이처럼 수필과 인생은 땔 수 없는 동행의 한몸이다. 맛도 같고 빛도 같지 않은가. 인생이 깊고 진솔하면 수필도 깊고 간박(簡樸)하다.
이처럼 수필은 건넌 마을 대가의 마루가 아니라 제집 뜰의 멍석 같은 것이라고 할까. 그래서 수필은 남의 발자국을 좇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의 인생을 쌓는 것이다. 인생이 여유가 있고 깊으면 수필 또한 그렇게 빚어낼 것이다. 걸어온 길을 돌아보며 살피게 되는 까닭이다. 어찌 그 맛이 깊을수록 여운이 있고 흐뭇하지 않으랴.
이 길은 조급하게 이룰 수 없다. 안개를 걷어내고 닫힌 문을 열어야 한다. 그리하여 보이지 않던 것을 보고 들리지 않던 것을 들어야 한다. 그렇지 않고 어찌 제 모습이 되겠는가. 제 성질을 모르고 어떻게 제 색깔을 드러낼 것이며, 닦음이 얕으면서 어떻게 맑고 밝음의 경지를 말할 수 있겠는가.
수필은 이런 것들을 그대로 드러낸다. 문채(文彩)가 고와도 제 빛깔이 아니고, 짜임이 그럴 듯해도 없는 것을 얽어 세운 것이라면 수필의 문에 들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남의 색깔로 제 빛을 드러낼 수 없으며, 허상으로 실제를 증명할 수 없다. 수필은 제 인생을 제가 쓰는 것이다. 그러므로 수필의 개성은 제 빛깔이며, 수필의 격은 제 닦음의 총화이다.
수필의 개성과 격조는 별난 짓거리와 허구로 세우는 것이 아니다. 스스로의 삶을 소재로 한 희로애락의 채색으로 그려내고 그 명암으로 짓는 것이며, 그 됨됨이로 격을 드러낸다. 그리하여 지난날의 부끄러움과 아픔을 삭이고 승화시켜 진솔함을 보이고 어긋남과 잘못을 자세히 사펴서 기울거나 꿀린 데가 없도록 하여 조화를 이룩하는 일이다.
수필의 여유와 깊은 맛은 숙성하지 않고 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무성한 계절과 천둥과 비바람을 견뎌내고, 가을의 사색과 관조와 겨울의 침잠이 따라야 한다. 이런 숙성을 거치더라도 누구나 같은 깊이와 여운이 아니다. 사색과 관조의 내공(內攻)에 따라 달라진다. 그러므로 수필의 경지는 삶의 비춰보는 밝기라고 할 수 있다. 그 밝기의 촉광이 높을수록 경지가 깊을 것임은 물론이거니와 여운이나 맛 또한 그렇지 않겠는가. 이처럼 수필은 스스로 인생을 그려가는 것이며, 그 경지에 따라 수필의 질과 격을 달리할 수 있다. 수필의 길도, 이런 과정에서 찾아야 한다.
그 길은 그냥 지나칠 수 있는 편한 길이 아니다. 새롭게 닦아가는 길이다. 스스로의 힘과 재능으로 소재를 요리하고 구성과 문체로 새롭게 지어가는 길이다. 아무리 진솔하고 경지가 높은 도인(道人)이라 하더라도 문맥이 흐르지 않고 문체가 서툴면 수필의 길에 동참하기 어렵다.
가을에서 겨울로 가는 숲길에서 수필로 인생을 그려보려 한다. 스산한 바람이 낙엽을 흩날리며 덧없음을 이른다. 성근 숲으로 하늘이 차다. 인생을 되돌아보며 수필의 길을 닦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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