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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세상/좋은수필 3

[좋은수필]엉치 달래기 / 정민아

엉치 달래기 / 정민아


 

 

느닷없이 엉치께가 시큰거린다. 출산을 앞두었을 때의 그 통증과 흡사한 걸 보니 아기집을 보호해 주던 골반 주변에 또 이상이 생긴 모양이다. 열 달을 웅크려 지내는 아기를 지키고자 든든했던 예전과는 달리 느슨해진 그곳이 이번엔 무슨 까탈을 부리는 것 같다.

잠을 설치게 되는 것을 보니 제법 심각한 변화가 온 느낌이 든다. 지난번 고속도로에서 심한 정체로 몇 시간을 차안에 꼼짝없이 앉아 있었던 적이 있다. 차라리 입석열차라도 탔더라면 내 엉치를 이렇게 힘들게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요통 완화를 위해 파스도 붙여보고, 약지와 새끼손가락 사이에 있는 신경 점과 손바닥 쪽 손목 가운데 부분을 힘껏 눌러도 보았지만 도통 차도가 보이지 않는다. 허리에 통증을 느끼게 되면 반듯하게 누워서 무릎을 세우고 그 뒤쪽에 베개를 받치고 무조건 쉬는 것이 일반적 가정요법 상식이다. 하지만 주부가 단 하루라도 농땡이나 파업을 하게 되는 날이면 그 여파가 삼사 일을 족히 넘는다는 것을 경험해 봤기 때문에 난감한 노릇이다.

파스는 아픈 엉치 주변을 찾아 부지런히 드나들었지만 결국 제 몫을 다하지도 못하고 애꿎게 버림을 당했다. 마지못한 나는 오래전 물리치료사가 일러준 온냉찜질팩을 번갈아 허리에 대고 누워, 세운 무릎을 두 팔로 감싸 안고 엉덩이를 지그시 눌렀다. 엉치를 달래는 푸닥거리인 셈이다. 하지만 단단히 성이 나 있는지 한쪽 골반에 자리 잡은 통증은 꿈쩍도 하지 않는다. 상처 없는 통증이라 꾀병으로 둔갑할 만한데 남편과 아이들의 근심은 부실한 내 등마루를 타고 엉치에 눌러앉았다.

창틀에 모여든 먼지도 걱정스러웠던지 며칠 새 꿈쩍도 하지 않는다. 마음 같아서는 창문을 열고 훨훨 날려주고 싶었지만 개수대에 포개져 있는 바짝 마른 접시들이 손사래를 치며 가만히 있으라고 한다.

누워있어야 하는 나 때문에 제대로 된 끼니를 챙겨 먹지 못하는 남편과 아이들을 생각하는 조급한 마음으로 병원을 찾았다. 엑스레이 사진 속 내 엉치뼈는 하트모양의 데칼코마니가 되어 의사의 진단을 기다리고 있었다. 좌골신경통이란 녀석이 아주 오랜만에 찾아왔다.

요통 전문병원답게 신속한 진단과는 달리 이런저런 받아야할 치료과정이 많았다. 침은 물론 온열치료, 전기치료, 기계치료, 광선치료와 마사지, 간단한 약물치료보다는 체계적이긴 하나 다소 번거로운 치료방법이 생각보다 까다로웠다.

평생 밭농사를 지으셨던 할머니의 굽은 허리가 문득 떠오른다. 그렇다고 할머니가 허리 디스크로 고생을 했던 기억은 없다. 오히려 몸을 움직이지 않는 요즘 사람들의 위축된 근육들 때문이란 전문가의 지적이 좌골신경통처럼 새삼 따끔거린다.

의사는 오른손잡이일 경우 평소 서서 일을 할 땐 왼발을 보폭만큼 뒤로 빼라는 생활 속 예방도 일러주었다. 최선의 방법은 아픈 부위를 무리하게 사용하지 않아야 하고 천천히 조금씩 달래는 것이라 했다.

며칠 동안의 통원 치료에도 불구하고 계속 당기는 한쪽 다리의 불평에 속수무책이다 보니 작은 영치의 반란에 은근히 화가 치밀었다. 작은 일에도 큰일처럼 까다롭게 구는 나를 애먹이느라 그 동안의 너그러움마저 슬금슬금 갉아먹고 있었던 셈이다. 덩달아 인내심마저 달아나고 없어진 모양이다.

통증을 가라앉히는 일은 격앙된 감정이나 어지러운 일을 가라앉히는 일만큼 쉽지 않다. 마음 또한 어느 한쪽으로 치우쳐 짓눌리게 되면 아프다. 심한 통증을 동반하는 격한 감정의 원인은 늘 내 안의 내가 더 문젯거리다. 나를 다스린다는 것은 평소 생활 습관처럼 몸에 배어야 할 마음의 습관이지 싶다.

아내보다는 어미로서의 삶에 더 기울어 있었을까. 독립한 아들을 지켜보는 마음이 현실과 이상을 사이에 두고 요란한 통증을 유발하곤 한다. 북극 빙하처럼 슬그머니 녹아 없어지는 나의 너그러움을 야속해 하며 가끔 찾아오는 불편한 심정에 추억을 덕지덕지 붙이며 달래본다. 하지만 생채기 없는 요통이나 마음의 통증은 스스로의 치유시간이 필요한 모양이다. 어느새 자식을 품었던 어미의 마음도 탈이 난 엉치가 되어간다.

막힌 마음과 경혈에 침을 맞기 위해 오늘은 좀 더 여유로운 마음으로 집을 나선다. 깜빡거리는 건널목 초록 불에 예전과는 달리 걸음을 멈추었다. 다음 신호를 기다리며 주변을 둘러보니 어느새 가로수 머리 위에서 가을빛이 주르르 타고 내려오고 있다.

나는 지금 한쪽으로 몰려 있는 삶의 정체기에 침을 맞고 달래는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