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에서 길을 찾다 / 변순자
활엽수가 우뚝 솟은 숲길로 접어들었다. 음습하고 차가운 기운이 훅 밀려왔다. 습기 머금은 발걸음을 편안하게 한다. 풀벌레 소리조차 들리지 않는 고즈넉한 공간이다. 심연의 늪으로 침잠하는 중이라 말하고 싶다. 크게 숨을 쉬어본다. 산소를 가득채운 커다란 애드벌룬 하나가 가슴에 차는 느낌이다. 혼효림의 숲길로 평탄하게 걸어 올 때와는 사뭇 다르다.
침엽수림에는 마음을 차분하게 진정시켜주는 물질이 분비되고 있지 싶다. 곁가지조차 용납되지 않고 쭉쭉 뻗은 나무들은 나무와 나무 사이의 공간이 조림으로 가꾼 듯 일정하다. 식물의 세계에도 사로 다른 개성을 존중해 주는 것인지 바둑판 같은 질서가 엿보인다. 중요한 일의 결단이 필요할 때는 침엽수 울창한 오솔길을 걸어보라고 권하고 싶다.
활엽수림을 걸으면 이제까지 보지 못한 새로운 식물의 모습을 찾기 위해 주위를 두리번거리게 된다. 칡넝쿨의 역동적인 성격으로 나무 사이의 경계를 지워버렸고, 서로 얼크러져서 살아가는 모습이 삶을 느끼게 하고 있다. 다양성을 서로 인정하면서 조화를 이루며 살라고 말하는 듯하다.
길을 가로 지르며 물줄기가 지나간다. 맑고 깨끗한 물줄기를 따라 주위에는 이끼가 곱게 자라고 있다. 숲의 온도와 습도가 엮어낸 녹색의 비로드 융단이다. 이끼는 숲을 고풍스러운 모습으로 변신시켜 놓았다.
산길에 접어들자 서서히 일행과의 거리가 멀어지기 시작한다. 하늘을 가리고 선 나무의 우듬지만 아스라이 멀어 보일 때는 방향감각을 잃기 쉽다. 일행의 꽁무니를 바싹 쫓는다. 그러다가 모퉁이를 돌아가 버리면 일행은 숲에 먹힌 듯 두려움이 엄습한다.
갑자기 발걸음이 허둥거려진다. 본능이지 싶다. 가슴에는 쿵덩쿵덩 절구공이를 내리찧고 있다. 아, 이럴 땐 담력 있는 사내이고 싶어진다. 설령 어두운 숲 저기에서 무엇이 튀어나오고, 일행을 놓쳐버린다 해도 심장을 뛰게 하는 두려움 따위는 떨쳐버리고 싶다고 외치고 싶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나뭇잎 사이로 내리쬐는 볕이 따가워 갓길 나무그늘을 이고 걸었다. 작은 들꽃에 일일이 눈인사를 하며 여유를 가지고 걸었다. 그 자리에 있는 것을 진심으로 고맙게 생각하는 마음이었다. 작은 풀꽃 하나에도 인연법으로 이리저리 얽혀 있을 거라는 생각을 습관적으로 떠올려 보았다. 함께 살아가는 모든 것에 대한 애정의 표현일 것이다. 집중력, 주의력이 있어 사물을 관찰하고 유추하며 근원을 캐낼 지식과 의지를 가지고 있는 것은 물론 아니다.
가시덤불 사이로 산딸기가 보인다. 진홍의 몸단장을 마친 것이 언제쯤이었을까. 어제도, 오늘도 많은 사람들이 이 숲을 지나갔을 터인데 왜 보지 못했을까. 조심스레 스틱으로 발 디딜 곳의 풀 위를 두들겼다. 뱀을 쫓기 위해서다. 산딸기가 익을 무렵이면 잔뜩 독이 오늘 뱀이 딸기나무 아래 똬리를 틀고 있다고 들었다.
산딸기는 손이 미처 다가가기도 전에 바닥으로 떨어진다. 혼기를 한참이나 지나버린 노처녀도 이와 같다는 비유를 떠올리며 웃었다. 예외의 일도 있겠지만 모든 일에는 경중완급의 조절이 필요하다는 것을 부정하고 싶지 않다. 손놀림이 한결 공손해진다. 금방 딴 것이 한줌이나 되었다.
울창한 숲에는 먹을거리가 풍성하다. 숲은 배고픈 자의 허기진 배를 궁휼히 여겨 먹을 것을 가득 채워 놓은 저장고이다. 산딸기가 자취를 감추면 으름과 깨금, 산머루며 풀뿌리, 나뭇잎 등이 지천으로 깔린다. 숲은 바깥세상과의 소통이 원활하지 못하다 해도 자활의 길이 준비되어 있다.
숲에서 길을 잃으면 이런저런 방법을 써보라고 책이 말한다. 숲속에 길이 있다고 한다. 숲의 깊은 맛에 빠지면 길이 보이고 그 길은 무한의 길을 열러 준다. 한정된 시간을 주체하지 못하고 허비하다가 비로소 뭔가를 느끼게 된 나이를 숲에서 깨닫는다.
요즘은 책속에서 자주 길을 잃어버린다. 의식(意識)과의 보조가 맞지 않아 자꾸 어긋나고 있다. 일찍부터 동행하던 습관이 배어 있지 않은 탓이리라.
서림(書林), 글의 숲에서 후회와 자책으로 뒤범벅이 된 지금은 혼란스럽다. 글을 쓴다는 것도, 읽는 것도 예사로운 일이 아니라며 은근히 편한 길을 열고자 한다.
숲에 들어서서 비로소 서림을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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