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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세상/좋은수필 3

[좋은수필]하얀 낙타 / 김정화

하얀 낙타 / 김정화


 

 

모래의 바다가 들썩인다. 바람이 모래 파도를 치올리면 둔덕은 물결을 만들고 바닥은 문양을 뒤집는다. 사막 바람은 광대무변의 땅을 화폭 삼아 순식간에 진묘한 풍경을 그려낸다. 지난겨울에 백설로 고요했을 이곳이 지금은 바람의 땅이 되어 훈열을 내뿜는다. 그 바람에 몸을 맡긴 나는 지금 몽골 사막 한가운데 서 있다.

얼마나 지났을까. 저만치 모래바람 속에 그림자 하나가 흔들린다. 하얀 쌍봉낙타다. 흰 갈기를 펄럭이며 그가 초연히 사막을 걷고 있다. 서두르지도 늑장을 부리지도 않은 채 뚜벅뚜벅 맨발로 걸어간다. 하얀 낙타 한 마리가 낸 사막 길이 붉은 지평선을 향해 뻗어 있다. 모래땅에 찍힌 낙타의 굽은 발자국이 낙관인 양 뚜렷하다.

나는 하얀 낙타가 있다는 사실을 몽골 영화에서 처음으로 알았다. 몽골에서는 하얀 낙타를 차강티메라고 부른다. 예전에 호주의 중앙사막을 가 본 적이 있지만 그때만 해도 차강티메의 존재를 알지 못했다. 그곳에서 낙타 투어를 할 때 모든 낙타는 당연히 황갈색 털을 가졌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토록 와 보고 싶었던 몽골 사막에서 하얀 낙타를 접견하다니. 가끔은 영화가 현실로 연결될 때가 있다는데 난생처음으로 흰 낙타와 조우하게 된 것이다.

영화 속 차강티메의 젖은 눈을 잊을 수가 없다. 고비 사막 사람들은 흰색 낙타를 매우 귀하게 여긴다. 흰색이 모든 생명체의 젖 색깔과 같아서 더욱 신성하다고 믿어왔다. 간혹 유목민들은 흰 낙타를 하늘에 제물로 바쳐 가축의 번성과 그들의 안녕을 빌었다. 그런데 그 제물을 바치는 의식은 우리의 생각과 달리 산 채로 풀어준다. 이때 주인은 너를 죽이거나 먹지 않겠다. 팔지 않고 때리지 않고 상하지 않게 하겠다.”고 낙타에게 약속한다. 그것은 누구의 소유물도 아니고 아디에도 머물지 않는 영원한 자유를 의미한다. 동물이 인간에게 구속되지 않기를 기원하는 말 속에는 자연에 얽매이지 않으려는 유목민 스스로의 희원이 아닐까.

흰 동물에 대한 경배심은 어느 국가에서든 대대로 전해온다. 고대 로마인들은 특별히 행운이 따르는 사람을 흰 암탉의 아들로 추켜세웠고, 아메리카 원주민들은 흰 들소를 부활과 희망의 상징으로 믿었다. 몽골 사람들은 흰 낙타 외에도 흰 암사슴이 시조 바타치칸을 낳았다고 생각하며, 인도에서는 흰 올빼미를 번영의 여신으로 신성시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미얀마에서 흰 코끼리가 존경의 대상이라면 우리나라도 백호의 태몽을 길몽으로 풀이한다. 나 역시 배추흰나비만 날아와도 행운의 징조라 믿는 것은 흰색에 대한 경외심이 뿌리 깊은 까닭이다.

주인의 손을 떠난 차강티메는 평생 혼자 살아간다. 사막을 떠돌며 운명의 길을 묵묵히 걷는다. 혹한의 밤과 폭염의 낮을 견디고 광야의 눈비를 스스로 버텨내야만 한다. 고비의 고독을 온몸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러한 삶을 이겨낸 차강티메의 눈빛은 결기가 그러나고 몸체는 위엄이 서리어 발걸음은 더욱 굳건해진다. 고매한 인품을 가진 자나 남다른 재능을 가진 사람 역시 어쩌면 흰 낙타의 삶을 뒤따라야 할지도 모른다. 순탄치 않은 생이다.

남과 다른 삶은 얼마나 외롭고 쓸쓸한가. 살아본 사람이라면 반복되는 삶이 얼마나 지루한지 안다. 하지만 그 삶을 이겨낸 사람이라면 익숙해지는 것이 곧 단단해지는 길이라는 것도 안다. 타인의 삶을 함부로 말하지 말라 차강티메의 꼿꼿한 몸짓이 전해주는 듯하다.

독야청청하기가 어디 쉬운 일인가. 홀로 있기란 어려운 일이고, 들판에 홀로 있기란 더욱 어려운 일이고, 황야에서 홀로 견디기란 더더욱 어려운 일이다. 가난한 천재 예술가, 묵언의 수행자, 유행을 등지고 외길을 고집하는 장인. 때로는 난세에 삶을 이어가지 못하는 일도 생긴다. 따가운 시선의 고독감을 감내하지 못해 주저앉는 슬픈 경우이다.

하지만 그들이 있기에 세상은 짐작보다 덜 속되었다고 여겨진다. 예술가들의 영감이 없었다면 어찌 울고 웃을 수 있을 것이며 선지자들의 예지가 번득이지 않았다면 어찌 지혜를 얻을 수가 있을까. 우리는 영화 속의 차강티메보다 현실의 차강티메 같은 인간을 인정하고 그들의 존재를 더 귀하게 여겨야 하겠다.

앞서 가던 낙타는 어느덧 보이지 않는다. 광활한 사막 위에는 외길 낙타의 발자국만 눈이 시리도록 뚜렷하다. 쓸쓸하다 못해 숭고하기까지 하다. 슬며시 몸을 돌렸다. 돌아서 바라본 모래사막에는 오직 낙타와 나의 발자국만 나란히 찍혀 있다. 항상 존재하지만 보이지 않는 것이 바람이다. 흙바람이 모래를 쓸어내려 내 발자국을 조금씩 지워간다. 그러나 움푹 파인 낙타의 발자국은 그대로 남아 있다. 내가 찍은 발자국마저도 깊고 뚜렷한 낙타의 족적에 비할 수가 없다. 인간이 이곳에 와서 남긴 자국은 가벼운 바람조차 이기지 못하는 순간의 흔적인가보다.

어찌 보면 인간은 차강티메보다 못한 동물일 수 있겠다. 그래도 사막의 한 점 발자국이 내 존재하면 살아 있다는 것이 눈물겹도록 행복하다. 남겨진 낙타 발자국을 따라 되돌아 걷는다. 바람에 실려 사그락 흘러내리는 모래 소리가 등 뒤에서 들려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