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피 여행 / 박경대
카페 ‘플로리안’이 보이자 갑자기 가슴이 두근거린다. 십여 년 전 이 근처를 들렀을 때도 유명한 곳이라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별 관심 없이 흘끔 보고 지나쳤던 카페였다. 그러나 커피를 공부하고 있는 지금은 이탈리아라는 단어만 들어도 생각나는 곳이 되었다. 지난달부터 시작된 유럽기행 프로를 즐겨보던 아내의 성화에 못 이겨 서유럽을 여행하다 들리게 된 것이다.
물의 도시 베네치아의 산마르코 광장에 자리한 플로리안은 유럽에서 가장 먼저 영업을 시작하여 그 역사가 삼백 년이 되었다. 바이런, 릴케, 괴테, 바그너 등 명사들의 단골 카페였으며, 전쟁 중에도 문을 닫지 않아 이곳을 점령한 나폴레옹도 커피를 마시러 왔다고 한다. 또한 여성들의 출입을 허용한 유일한 곳으로 바람둥이 카사노바가 뭇 여인들을 유혹하였던 장소이기도 하다.
카페 앞 무대에는 네 명의 악사가 감미로운 칸초네 곡을 연주하고 있다. 첼로, 피아노, 바이올린 그리고 아코디언의 조합이 조금은 어색하게 보였으나 그들이 내는 화음은 놀랄 만큼 아름답다. 흰 유니폼을 입고 다가온 웨이터에게 에스프레소 도피오와 카푸치노 한 잔을 주문하고 연주음에 빠져든다.
나는 커피를 무척 즐긴다. 푸르스름한 새벽녘에 눈을 뜨면 밤새 꾸었던 꿈보다 먼저 떠오르는 것이 커피이다. 창밖으로 쏟아지는 시원스러운 빗줄기를 바라봐도 그렇고 달콤한 음악을 듣고 있을 때도 한잔 생각이 난다. 설산의 정상에서 대자연을 바라보며 음미하는 그 맛은 느껴보지 않은 사람에겐 설명하기 힘들다. 그동안 여행과 사진, 음악 등 다양한 분야에서 매력을 느껴 보았지만 가장 깊고 오래 빠져든 것이 커피이다. 애주가라는 타이틀을 달고 있는 내가 반주를 먹지 않는 날은 있어도 커피를 거르는 날은 결코 없다.
처음 커피를 접했던 학창시절에는 이렇게 쓴 걸 무슨 맛으로 먹을까하고 의아해하며 마셨던 기억이 난다. 그래도 줄곧 마셨던 것은 어른 흉내를 내고 싶어 부렸던 객기가 아니었을까. 그때는 동결 건조된 가루를 뜨거운 물에 타서 먹는 것이 커피의 전부인 줄 알았다. 그러던 어느 날, 원두를 갈아 추출하는 사이폰 커피를 알고 나서 비로소 커피를 조금 알게 되었다.
잘생긴 청년이 커피를 가져온다. 우유, 시럽, 빈 컵에다 접시까지……. 플로리안의 문장이 찍혀있는 하얀 그릇들이 큼직한 은쟁반에 가득하다. 고소한 향내를 내며 에스프레소 위를 덥고 있는 황금 크레머가 눈까지 즐겁게 한다. 청년은 나에게는 관심 없고 카사노바의 후예답게 아내에게 커피 먹는 법을 설명하고 있다. 자신을 쳐다보고 있다는 어색함 때문일까. 나에게 건성으로 말을 건넨다.
“Are you from?"
나도 건성이다.
“korea, south"
청년은 어깨를 한 번 으쓱하더니 가버린다.
이곳의 에스프레소는 과연 어떤 맛일까. 크레머에 입술을 적시니 이내 코끝엔 향긋한 아라비카 향이 스친다. 부드러운 거품을 통과한 혀가 커피에 닿았는지 강한 쓴맛에 조금 탄 맛도 느껴진다. 이탈리안 로스팅이다. 프렌치보다 더 높은 최고 단계의 강 배전이다.
에스프레소는 익스프레스에서 따온 말로 빠르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 원두를 갈아 고온의 증기압으로 추출한 것으로 모든 커피의 기본이 된다. 여기에 뜨거운 물로 희석시킨 커피가 ‘아메리카노’이다. 미국인들이 즐겨 마신다고 그렇게 부르는 것이다. 또한 물대신 우유를 넣으면 ‘카페라떼’가 되며 우유거품을 만들어 얹히고 시나몬을 뿌려 향을 더하면 ‘카프치노’가 된다. 그리고 에스프레소에 우유와 초콜릿을 첨가하여 달콤한 맛이 나는 커피를 ‘카페모카’라고 부른다.
커피는 일반적으로 로스팅 정도에 따라 단맛, 떫은 맛, 신맛, 쓴맛이 결정되지만 그 이외에 또 다른 요인들도 있다. 생두를 생산하는 곳도 아프리카와 남미대륙 등 다양하고 같은 지역이라도 등급과 커피콩을 수확하는 산지의 고도에 따라 향이 다르다. 또한 다른 원두와의 적절한 브랜딩도 중요하며, 로스팅 된 후 경과한 시간, 분쇄된 원두의 탬핑에서도 차이가 난다. 심지어 커피를 담아내는 앙증스러운 잔, 장소의 분위기도 커피 맛을 좌우하는데 한몫을 거든다.
에스프레소는 워낙 쓴 원액이라 잔도 조그맣다. 한 번 홀짝이면 끝이기에 늘 두 잔 분량의 도피오를 주문한다. 커피의 본질을 느끼게 하는 그 매혹의 향을 입과 가슴에 오래도록 남겨두고 싶기 때문이다.
카페의 분위기에 젖어들고 있던 순간, 귀에 익은 곡이 연주되고 있다. ‘아리랑’이었다. 흠칫 놀라 무대 쪽을 바라보니 서빙 하던 청년이 이쪽을 보며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운다.
‘아! 건성으로 국적을 물었던 것이 아니었구나.’ 나도 팔을 들어 화답을 한다. 커피 잔은 어느새 바닥을 드러내었다.
곤돌라에 승선 할 시간이 되어 자리를 털고 일어선다. 접시에 놓인 계산서를 보니 연주비와 자릿세를 포함한 커피 값은 35유로……. 우리 돈으로 4만원이 넘는다. 화려한 명성의 카페이니 가격 또한 화려한가보다. 하긴 세계 최고의 카페에서 향기로운 커피와 그간의 그리움, 멋진 4중주, 더하여 아름다운 여인과 함께 마셨으니 그럴 만도 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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