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갑 열기 / 김상립
오늘 아침, 아내는 어디서 귀동냥을 했는지 사뭇 진지한 표정이다. ‘지금 당신이 밖으로 나다니면서 남들이 회장님, 선생님 하고 불러주니 당신을 퍽이나 인정하고 대접해 주는 것으로 착각할지 모르겠지만 어림없는 소리요. 당신 나이를 생각하면 뻔한 일 아니오? 앞으로 계속 모임에도 나가고 젊은 이들과 어울리고 싶으면 반드시 이것만은 지켜야 한답디다. 즉, 어떤 모임이든 초대 받지 않으면 가지 말고, 기왕 갔으면 되도록 입은 닫고, 지갑은 자주 열어야 한데요.’ 하는 것 아닌가. 물론 아내의 말이 우스갯소리였겠지만 가만히 생각해 보니 꼭 맞는 말이다. 만약 내가 이 세가지만 잘 지킨다면 인기 있는 노인네가 될 공산이 상당히 커지겠지만 현실적으로는 쉽지 않을 듯 하다.
도대체 진정한 뜻을 담아 초청하는 경우와 나중을 생각해서 형식적으로 알려주는 행위를 어떻게 구분해야 하는가? 나는 지금도 동무 따라 강남 가듯이 아무 모임에나 참석하지는 않는다. 인터넷 카페를 통해 어느 행사내용을 알았다든지, 간접적으로 소식을 듣고는 거의 참석하지 않고 있다. 적어도 초청장을 받든지 주최측으로부터 직접 연락이 오기 전에는 좀처럼 가지 않는다. 하지만 어떤 날은 그 모임의 분위기에 영 어울리지 않는 나를 발견하고는 혼자 쓴 웃음을 지을 때가 있으니 아직도 판단력을 더 길러야 할까 보다.
그러나 정작 더 신경을 써야 할 일은 참석여부 보다는 참석했을 때 적당한 기회에 슬그머니 그 자리를 빠져 나오는 일이지 싶다. 남의 잔치에 손님으로 참석하여 끝까지 자리를 지켜 주어야 할 경우도 있겠지만, 반대로 그런 행동이 성의로 보이기는커녕 속 없는 사람으로 치부되기도 하기 때문이다. 모임의 분위기로 보아 나와 걸맞지 않다고 판단되면 가능한 빨리 자리를 떠나야 하는데 머뭇거리기도 한다. 또 슬그머니 나오다가 후배들에게 붙들려 도로 주저앉는 경우도 생긴다. 그러나 지나고 보면 떠나겠다고 마음 먹었을 그때가 제일 알맞은 시간이었다는 사실을 늘 깨닫게 된다.
다른 한 편, 모임에 가서 입을 닫고 있는 것도 상당히 어려운 문제이다. 지나치게 침묵하면 기분 언짢은 일이라도 있나 하여 남들이 신경 쓰게 될 것이고, 피할 수 없어 말을 해야 할 경우라도 조심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특히 간섭하는 식의 말이라든가 지난 날의 경험을 너무 강조한다든지 제가 잘 모르는 일에는 나서지 않아야 한다고 믿고는 있다. 온화한 표정과 잔잔한 미소로서 그 분위기에 잘 어울리고 있다는 태도를 취하는 게 제일 무난하다고 생각도 하고 있다. 그러나 이치에 맞지않는 얘기들이 질펀하게 오고 가면 아직도 내 성정은 불같이 일어 어떤 자리가 되었건 ‘그건 옳지 않다’고 직선적으로 말해버리니 나는 참 난감한 사람이 아닐 수 없다.
아내가 말한 것 중에서 제일 어려운 일이 지갑 바로 열기가 아닐까 한다. 이 세상에 자기 돈 아깝지 않은 사람 하나도 없을 것이다. 더구나 벌이가 끊긴 노인의 경우는 더욱 절실할 것이다. 그런데도 지갑을 자주 열어야 한다면 과용하지 않는다는 전제가 반드시 필요하리라. 만일 한 때의 기분 때문에 내 힘에 넘치게 돈을 썼다면 그 후유증은 꽤 오래 갈 것이다. 그러나 기왕에 쓸 돈이면 좋은 기분으로 돈을 쓰자고 마음은 먹고 있다. 만약 남의 손에 이끌려서 억지로 돈을 내거나 속 마음과는 달리 체면치레 때문에 지갑을 열게 되면, ‘아까운 돈을 공연한 곳에 썼다’는 후회 때문에 그 돈 값 이상으로 시달리게 될 것이니 피해야 할 일이 아니겠는가.
또 좋은 마음으로 계산을 했으면 남들이 고마워하면 다행이고 아니해도 그 뿐이어야 한다. 만약에 제가 쓴 돈보다 더 이상의 대접을 받으려 한다면, 오히려 역 효과가 나서 돈도 잃고 사람도 잃을 우려가 있을 것이다. 남을 대접하는 데는 소리없이 움직여야 하고, 대접을 받을 때는 감사함을 잊지 않도록 하는 것이 옳은 태도라 생각한다. 나는 어떤 곳에서 얼마만한 돈을 지불했던 간에 일단 나간 돈에 대해서는 곧장 잊어 버리려 노력하는 편이다. 그렇지만 지갑 잘 여는 일은 지금도 나에게 힘든 일이고 앞으로도 계속 어려운 과제가 되지 싶다.
내 동창생 중 한 사람이 부동산을 잘 만진 덕분에 상당한 재산가가 되었는데, 간혹 동창들을 불러 비싼 식사 대접을 했었다. 처음에는 연락 받은 사람 대부분이 참석했는데 회가 거듭될수록 그 숫자가 줄어들어 요즈음 와서는 그런 일 자체가 없어져 버렸다 한다. 내용인즉, 그가 톡톡하게 한 잔 사는 것 까지는 좋았지만 항상 제가 쓴 돈보다는 더 많은 생색을 내었다는 것이다. 그는 돈을 쓰며 잃었던 세월을 보상 받고 마음으로부터 만족을 얻고자 했었나 보다. 술 자리에만 앉으면 우쭐하여 잘난척하고 돈 자랑 하기에 침을 튀겼다니. 상식 있는 사람들이라면 제가 대접 받은 것 이상으로 불편을 느끼게 되면 다시는 그런 자리에 가고 싶지 않아 하는 자존심을 그 친구는 무시해 버렸던 것이다.
주위를 살펴보면 돈이 많다고 지갑을 자주 여는 것도 아니오, 좀 빡빡한 형편이라도 적당한 때에 지혜롭게 지갑을 여는 사람이 이외로 많은 세상임을 알게 된다. ‘재산과 지갑 여는 빈도가 반드시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라고 말 할 수 있는 인생사가 참 재미있다. 그러나 막상 여유가 없으면서도 알량한 자존심 때문에 호기를 부리는 사람이나, 제 자신을 위해서는 돈을 잘 쓰는 이가 남 앞에만 서면 지갑을 아예 자물쇠로 채워버린 듯한 사람들을 보면 참 딱하다는 생각이 든다. 하기야 신문이나 방송에 광고 되는 일도 아니며, 입 소문이라도 나서 제 얼굴이 설 일도 아닌 자리에 작은 돈이라도 흔쾌히 쓴다는 게 어디 쉬운 일이겠는가. 그렇지만 이런 행위가 있어서 세상은 더욱 정겹고 살만한 곳으로 이어져 나가니 이 난제를 어찌 풀면 좋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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