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이뤌 / 염귀순
그와의 작별은 예견된 것이다.
그의 소리는 나지막한 허명으로 다가왔었다. 한 계절이 익어갈 무렵, “지금도 기억하고 있어요 시월의 마지막 밤을.” 이라고 읊조리던 사람들 마음 바닥에서부터 배경 음악처럼 깔려 있었다. 그가 오는 소리는 곱디고운 단풍이 생의 마지막 절정을 불태우던 가을 나무속에도 있었고, 끝물을 날려 보낸 잎새들이 바람에 공중그네를 타며 낙하하던 순간에도 엎드려 있었다. 마른 낙엽으로 구르던 어느 길모퉁이에도 스며 있었다. 그렇게 가만가만 우리 곁으로 왔었다.
그의 존재란 많은 의미를 함유한다. 시도 때도 모호하여 시작도 끝도 없던 순간에 시간의 마디를 만들고, 계절을 나누고, 해를 구분한 끝자락마다 매듭을 만들고, 계절을 나누고, 해를 구분한 끝자락마다 매듭을 짓듯 세워 둔 그 한 해의 마감은 그와 함께여야 비로소 완료된다. 사각사각 변화무쌍한 날들을 다 겪어낸 그와 마주 서면 멀어져 가는 것들이 파노라마로 떠오른다. 낭만, 정열, 우애, 믿음, 용기, 도전, 꿈…. 조금씩 고독해 보이는 그가 때로 칼칼한 바람을 몰고 오는 까닭은, 마음에서 너무 멀리 떠나왔으므로 속을 들여다보는 것일 수도 있다.
기억을 더듬어 보면 그를 손꼽아 기다리던 날들이 있었다. 그가 데려오는 신나는 것들 때문이다. 우리 동네 딱 하나뿐이던 교회에서 유년부 선생님으로부터 처음 받아 본 그리스마스카드와 그래서 더욱, 무작정, 즐겁던 성탄절도 그가 준 선물이었다. 몽글몽글한 새알심이 든 팥죽 먹는 날과, 갓 담든 김장 김치로 배부르던 시간과, 눈밭에서 맘껏 뛰놀 수 있는 겨울 방학도 죄다 그가 데려다 준 것들이었다. 그가 왔다 가면 새 학년이 되는 것, 상급 학교로 가는 것, 그런 것만으로도 벅차고 행복하여 달콤한 기다림이었다. 가장 순수의 세상이었으며, 영영 돌아갈 수 없는 시간이며, 돌아가지 못하는 그리움이다. 그래서 가슴마다 하나씩 그에 대한 그리움이 자라는 것이지 싶다.
안타깝지만 그가 별로 달가워지지 않은 것은 언제부터일까. 갈수록 그의 걸음이 따라붙는 가속이 당황스럽고, 그가 온다는 사실에 가슴부터 철렁 내려앉는 건 또 언제부터였을까. 세월이 ‘기다림’을 변화시켜 놓은 것이다. 지금은, 절대 반가워할 수 없는 그가 왔다.
계절의 파수꾼이며 한 해의 끝매듭으로 어김없이 나타난 그를 어떻게 감당해야 하나. 왠지 빚진 사람처럼 한없이 불편한 심기다. 그가 올 때마다 ‘할 걸, 하지 말 걸’의 아쉬움과 후회와 정체 모를 불안감이 겹쳐 착잡해진다. 그의 꽉 찬 포옹은커녕 쩔쩔매는 가슴에 용한 처방이나 신통방통한 대책은 없을까 노심초사로 난감하기 짝이 없는 손님맞이 아닌가.
불청객인 그로 인해 날마다 마음 앉힐 자리를 물색 중이다. 그가 끌고 온 난데없는 허탈과 허무의 바람에 부대끼다 만사 ‘귀차니즘’ 모드인 몸을 억지로 추켜세워 본다. 라디오 평화방송에 주파수를 맞춰 놓고 거실에 널린 신문부터 걷어낸다. 맑게 울리는 성가와 기도문을 들으면서 허하기만 한 가슴을 어찌할 수 없어 쌓아 둔 책탑 정리를 시작한다. 집 안 구석구석 먼지도 털어내고 청소기도 씽씽 돌린다. 안방 건넌방을 거쳐 주방 현관까지 걸레질을 하며 닦아내고 싶은 내 속인 양 박박 문지른다.
작정하고 시작한 혼자만의 거사에 한 끼 때를 거른 것쯤 대수이랴. 내친김에 신발장 정리까지 모두 끝내고 배가 불룩해진 쓰레기봉투에 마음속 부유물도 함께 쓸어 담는다. 꾹꾹 눌러 채운 쓰레기봉투를 들고 나가 아파트의 대형 철제 쓰레기통에 봉투째로 투척하는 순간, 초겨울 짧은 해가 다 저물었다. 휴우, 쨍하게 이마를 스쳐가는 바람이 어째 차갑지만은 않다.
점검하듯 실내를 한 바퀴 둘러보는 눈길이 세심해진다. 티 하나 없이 정돈된 곳이면 마음 자리도 가지런히 깃들까. 천천히 롤스크린 커튼을 내려 본다. 거실의 레이스 커튼을 가볍게 푸는 것으로 하루치의 마음 운동도 막을 내린다. 잠시 후 엔 찰카닥 찰카닥, 형광등 불빛을 넉넉히 풀어 사방을 환하게 채울 요량이다.
제 마음인데 달리 누가 다스려 줄 것인가. 오늘을 살아야 하고 내일에 오롯하기 위함이라면 한 몸 ‘올인’하여서라도 마음을 붙잡아 보겠다는 의지가 가상할 뿐이다. 초조와 허망함으로 안절부절못하거나 무기력에 빠지기 일쑤인 백해무익, 흥미 제로의 가슴앓이 놀음에서 탈출할 수 있다면 말이다. 몸이 가는 자리엔 마음 따라붙기 십상이라는 듯, 종일 바쁜 육신을 쫒아가느라 조금은 홀가분해진 속이 그나마 신통하다.
그는 아무런 말도 없이 무량한 깊이로 지켜만 본다. 청하지 않았건만 해마다 한 발짝 한 걸음 낮은 소리로 다가와 어느 날 수상한 바람을 부려 놓고 침묵한다. 말없이 수많은 의미를 부여한 채 원치 않아도 내 앞에 떡하니 서 있는 그다. 흡사 가는 시간, 오는 시간 사이에서 엉거주춤한 사람들을 살피려는 과묵한 수문장인 것처럼, 잊고 있던 내 모습과 지나간 시감들을 반추해 주는 그의 실재가 화들짝 당혹스럽지만, 그러면서도 나를 살피고 곧추세우기에 다행한 맞닥뜨림인지 모른다. 만일 그가 없었다면 이 계절을 가다듬어 새해 새날을 펼칠 수 있었을까.
이제 그를 보내야 할 시점이다. 왔다 가는 것이 어디 시간뿐일까만 그의 뜻을 새기며 고단했을 그를 의연하게 쿨(cool)하게 보내 주겠다. 그가 애써 이어 준 또 하나의 시간 줄을 다부지게 잡기 위해 잠시 흔들거렸다 한들 가라앉진 않겠다.
한 해의 매듭으로 어엿한 종결자인 그대, 묵묵한 12월! 섬섬한 눈빛으로 먼 길 살펴 가시게……. 고마우이.
저무는 해, 마침줄, 사라짐, 다시 그리움인 것.
끝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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