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음죽(觀音竹) / 김규련
너는 난초도 아니면서 난초보다 더 청아하다. 대나무도 아니면서 대보다 더 절개가 서릿발 같다. 영물도 아니면서 관음(觀音)이란 이름을 얻었다.
내가 너의 이름을 불러 주면 너는 나의 가슴을 열고 들어와 내 감성의 영지에 네 고향 풍경을 그린다.
순식간에 장엄한 아열대의 밀림이 펼쳐진다. 온갖 짐승들의 몸짓 소리며 색깔 선명한 새들의 지저귐이 소나기 지나가는 소리며… 문명의 소음 한 가닥 끼어들지 않은 대자연의 소리가 적막을 뚫고 귓바퀴에 와 닿는다.
나뭇잎으로 앞만 가린 원주민들이 덩굴식물을 헤치며 뛰어다닌다. 나도 그들과 같은 발가벗은 몸으로 그들과 어울린다. 나뭇가지를 비벼서 불도 피우고 돌촉 창으로 수렵도 하고 밤새워 약무(躍舞)도 즐긴다.
짙푸른 잎새들의 강렬한 호흡에서 번져나는 천연의 향기가 찌들고 때 묻어 온 내 심혼을 행궈 준다고 할까. 빽빽한 수림 속에 가득히 스며있는 신묘한 생기와 야생의 소박한 미(美)와 치열한 생명력이 나를 동심으로 환생시켜 주는지도 모른다.
무녀가 무무(巫舞)로 씻김굿 한 마당 끝내고 숨 들이는 순간 느끼는 해탈감 같은 것이라 할까. 잔잔한 환희가 밀려온다.
이제 불편함도 부족함도 불안함도 없다고 하리라. 세상과 멀리했어도 근심하지 않는다. 홀로 있어도 두렵지 않다. 즐거운 일 있으면 즐길 뿐 방자하게 흐르지 않고, 애달픈 일 있으면 안타까워할 뿐 슬픔에 빠져들지 않을 터이다.
어느 해 봄 해질 무렵, 너는 가냘픈 여린 몸으로 도시의 길거리에 나와서 새 주인을 기다리고 있었다. 너는 그날로 내 집에 와서 나와 동거하게 됐던가. 20여 년, 무심한 세월 금세 흘러서 어느덧 너는 운문사(雲門寺) 뜨락의 반송(盤松) 같은 모습으로 자랐다.
사람의 한 뉘에도 사계절이 있다던가. 나는 이제 상심의 계절을 맞아 육신은 비록 황량할지라도 정신은 도리어 풍요롭고 싶구나. 너는 나의 이 염원을 읽어 봤는지 문득 내 시야에 들어와 섰다.
너와 나의 깊은 만남이 무슨 의미로 승화될 수 있을까. 세상의 많은 시인, 묵객과 화백, 가인(歌人)들이 나무와 꽃을 만나서 시며 묵화며 그림이며 노래를 남기지 않았는가.
소나무, 잣나무는 추사 김정희를 만나 불멸의 명화 「세한도」를 탄생시켰다. 소나무 둘, 잣나무 둘, 네 그루 나무가 성기지 않고 소나무 한 그루의 중동이 부러지지 않았더라면 「세한도」는 국보의 자리에 오르지 못했으리라. 추운 겨울 되어야 소나무, 잣나무의 기백이 비로소 드러난다는 세한지송백(歲寒知松柏)의 깊은 뜻이 숨어 있다고 하리라.
시인 임포(林逋)는 매화를 지극히 사랑한 나머지 매처학자(梅妻鶴子)의 전설을 남겼다. 그는 매화가 좋아서 벼슬 버리고 서호의 고산에서 평생 독신으로 지내며 매화를 아내로, 서호의 학을 자식으로 삼고 살았다던가. 신선처럼 고고하게 은거하며 사는 그의 풍모가 동공에 비친다. 그의 명시 「산원소매(山園小梅)」는 만고의 절창이라 하겠다. “…다행히 가볍게 시를 읊는 시인과 매화가 서로 어우러졌으니 가무의 금잔으로 흥을 돋울 필요가 없겠구나….”
석파 이하웅과 난초의 조우는 묵화로 꽃피어서 「필묵란도」라는 유형문화제로 남지 않았는가. 기세를 뿜으며 완곡하게 퍼져 오르는 난초 잎에 생동감이 넘쳐서 난향이 묻어날 듯하다. 그야말로 붓이 노래하고 먹이 춤춘다는 필가묵무(筆歌墨舞)의 경지에 도달했다고 하리라.
도연명은 관직에서 물러나며 유명한 「귀거래사」를 남겼다. 그는 고향 전원으로 돌아와 고된 농사를 지으며 시 쓰고 음주도 즐겼다. 그의 「음주」 20수 가운데 제 5수에는 “…동쪽 울타리 아래서 국화를 따다 그윽이 남산을 바라보니…”란 시구가 있다. 국화를 예찬해 온 그의 심지 한 자락이 드러나 보인다.
대나무는 충절의 영환과 상응하면 신화를 낳는다고 하리라. 고려 말의 충신 정몽주는 선죽교에서 철퇴를 맞아 피살된다. 그의 붉은 피 흐른 곳에 청정한 대나무가 솟아올라 ‘임 향한 일편단심’이 가시지 않았음을 알렸다고 하지 않는가.
라이너 마리아 릴케는 장미를 사랑하고 장미를 노래했으며 장미 가시에 찔려 백혈병을 얻어 죽었다고 하더이다. 그의 묘비명에는 “장미여, 오 순수한 모순이여…”라고 스스로 써서 남긴 글귀가 새겨져 있다고 한다.
산기슭 오솔길에 화려하게 산화한 낙엽들이 모여서 해마다 레미 드 구르몽의 시 「낙엽」을 낭송하며 귀토(歸土)의식을 치르고 있지 않는가. “시몬, 나뭇잎새 져 버린 숲으로 가자, 낙엽은 이끼와 돌과 오솔길을 덮고 있다. 시몬, 너는 좋으냐 낙엽 발자국 소리가… 우리도 언젠가는 낙엽이리라…”
수련은 모네를, 해바라기는 고흐를 만나 명화가 됐다. 지금도 세계 미술사에 보석처럼 빛나고 있지 않는가.
동백꽃, 라일락, 코스모스, 봉선화 등은 가인을 만나 애틋하고 정겨운 사랑의 모래가 되어 애창되고 있다.
소리를 보는 대나무여, 너에게는 영성이 있는지도 모른다. 너는 소리 내는 음과 침묵 속에 묻혀 있는 무음의 소리도 동시에 불 수 있으니 말이다. 너는 집안에 경사가 있을 것을 소리로 미리 보고 꽃을 피운다고 하지 않는가. 가정에 큰 재앙이 다가올 기색이 보이면 너는 스스로 고사해서 그 소식을 알린다고 했던가.
너의 신비한 영성은 어디에서 오는가. 너는 깊은 밤 홀로 깨어 흐르는 별빛을 타고 하늘과 소통하는지도 모른다.
천지간의 교신으로 별자리마다 내밀하게 간직한 천기를 조금씩 얻어내는 것은 아닌지.
관음죽아, 너는 시절인연이 어긋나서 나 같은 무명의 촌로를 상봉하게 됐구나. 우매한 내가 무슨 재주로 너를 예술로 선양할 수 있으랴. 그저 부질없는 낙서 두어 줄 남길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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