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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세상/좋은수필 3

[좋은수필]그냥 나왔어 / 조병렬

그냥 나왔어 / 조병렬



 

도시철도 지하 승차장으로 내려가고 있었다. 10여 미터 앞에서 한 노인이 지팡이를 짚고 천천히 걸어왔다. 노인은 나와 가까워지면서 계속 나를 쳐다보다가 멈칫멈칫하였다. 그 순간 나는 발걸음을 딱 멈추었다.

선생님, 어디 가시는 길입니까?”

아니야. 그냥 나왔어. 특별히 갈 곳은 없고, 매일 그냥 밖으로 나온다네. ‘와사보생이란 말도 있잖은가.”

중학교 때 국어 선생님. 그때 선생님께서는 30대의 패기가 넘치는 교사였다. 오랜 훗날, 나도 선생님과 같은 도시에서 교편을 잡으면서 간혹 선생님의 소식도 듣고 뵐 수도 있었다. 선생님께서는 장학사로 근무하다가 교장으로 퇴임하셨다.

그 후 20년도 더 지나서 우연히 뵙게 된 것이다. 선생님은 몇 년 전에 뇌졸중을 앓으셨다. 지금은 거동이 불편하나 많이 좋아져서 천천히 걸어 다닐 수 있어 다행이라며 미소를 보이셨다. 그 미소 깊은 곳에는 복잡하고 미묘한 삶의 강물이 흐르고 있었다.

좀 더 선생님과 함께하면 좋겠다고 생각하면서도 약속된 강의 시간이 있어서 전화번호만 여쭙고 헤어져야 했다. 열차에 앉아서도 선생님의 모습이 지워지지 않았다. 그 짧은 대화 가운데 잊히지 않는 한마디가 계속 머릿속을 맴돌았다.

그냥 나왔다는 그 말씀이 왜 그렇게 특별하게 들렸을까? 내 마음은 세찬 비바람에 일렁대는 물결처럼 복잡하고 혼란스러웠다. ‘선생님은 언제부터 그냥 나오고, 그냥 걷고 싶으셨을까?’ 나도 그럴 때가 더러 있지 않았던가. 그냥 나오고 걷는 것도 어쩌면 삶의 도정이고 역정일는지 모를 일이다.

선생님께서 말씀하신 그냥의 의미에는 내가 아직 느껴보지 못한 또 다른 심연이 놓여 있을 것 같았다. 한평생 바쁘게 살아오셨을 텐데, 이젠 정처 없이 그냥 나왔다는 그 말씀은 내 평온한 의식 보따리를 발기발기 찢어 놓았다. 창백한 안색과 어두운 표정에서 세월의 무상함이 잔뜩 배어 있는 듯했다. 선생님을 뵌 반가움보다는 세월의 연민 너머로 엄습해 오는 내 심경이 지루한 장맛비처럼 더욱 질펀해져 왔다.

선생님과 헤어져서 열차에 앉아서 보니, 차에는 유달리 노인들이 많았다. ‘저분들은 어디로 가는 중일까? 선생님처럼 그냥 나왔을까?’ 그때 창밖으로 내 모습이 비쳐 보였다. 갑자기 나도 모르게 허리를 곧게 펴고 똑바로 앉으려고 하는 자신을 보며 잠시 미소를 지었다.

며칠 뒤, 선생님께 전화했다. 점심을 함께하자고 말씀드리니, 사양하시면서도 매우 반갑게 약속 시각과 장소를 정했다. 당신의 가족과 건강 이야기며 오랜 교직 생활에 관한 말씀으로 시간이 부족했다.

와사보생(臥死步生)’, 누우면 죽고 걸으면 산다는 말일 듯하다. 선생님은 생사의 문제를 얼마나 많이 생각하셨을까? 당신께서 거동이 자유롭지 못하니 가족도 친구도 늘 함께할 수도 없다. 하물며 지인들과 식사 약속도 편히 할 수 없다. 몸이 불편한 지 수년이 되니 저절로 혼자가 되더라는 말씀이었다. 말씀 곳곳에서 외로움과 쓸쓸함이 이마의 땀처럼 스미어 나왔다. 선생님의 동공 속에 덧대어 보이는 내 모습을 외면할 수가 없었다. 늙고 병들면 남에 대한 의식보다 더 소중한 것이 자신의 생명줄이고, 자신에게 더 끈질기게 집착하게 되더라는 말씀에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이런 몸이 되니 세월이 무상하고 웃을 일이 별로 없어. 지난날, 건강도 돌볼 겨를 없이 앞만 보고 달린 직장 생활이 그때는 사명감이고 보람이고 성취감으로 여겼는데, 지나고 나니 그것이 진정한 행복인지도 알 수 없어.”

선생님의 인생은 뿌리 없는 평초(萍草)는 분명 아니었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고 보니 미처 알지 못했던 작은 깨우침 같은 것들이 뒤늦게 찾아오더라는 말씀이었다.

옛사람이 노래했듯이, 인생이란 천지간의 하루살이요, 드넓은 바다의 좁쌀 한 알과 다를 바 없는 존재로서 한순간도 변하지 않을 수 없을는지 모른다. 그러나 달리 보면, 천지 만물은 오직 하나의 근원으로서, 나고 죽음마저도 따로 없는 영원한 생명일 수도 있지 않을까? 이렇게 되뇌며 짧고 덧없는 삶을 위로받으며 시름을 잊고 싶어지는 것이 우리네 인생일 것 같다.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인생길에서 위대한 노병 같은 존재도 흐르는 세월 앞에서는 비록 연약하고 초라한 모습일지라도 그 눈빛 속에 빛나는 인생 훈장은 숭고한 것이리라.

당신께서는 내일도 모레도 오랜 훗날에도 햇살이 환한 세상 속으로 웃으시며 또 그냥 나오실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