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살이 3제 / 이순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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Ⅰ. 살아가는 이야기
친한 동창생의 아내가 남편이 입원했다며 전화로 흐느끼기 시작했다. 폐암 말기 진단을 받아 교수직까지 휴직하고 투병하던 친구는 별일 아니라는 듯 병상에 태연하게 누워 우리를 맞았었다. 하지만 그의 가족은 병실에서 따라 나와 준비하라는 의사의 말을 비통한 표정으로 우리들에게 전해주었다. 친구는 다음 달쯤 퇴원하게 될 것 같다더니 겨우 며칠을 자나지 않아 조용히 눈을 감았다. 하얀 국화꽃 속에서 웃는 그의 영정에 절을 하면서 젊은 나이에 갔다고, 그렇게 담배를 굴뚝처럼 피우더니 역시 술과 담배에는 장사 없다고 우리들은 아쉬워했다. 하지만 돌아오는 차 안에서 친구를 보낸 슬픔에 앞서 나는 아직 살아 있다는 다행스러움에 가슴을 쓸어내리며 묘한 기분이 들어 혼자 쑥스러웠다.
발인하는 아침에 그토록 붙어 다니며 잉꼬임을 자랑하던 부인이 얼마나 슬피 우는지 가슴이 묵직하였다. 남편이 없는 세상을 어떻게 살아낼지 걱정이 앞섰다. 듬직하게 키운 아들이 둘이나 있고, 모두 유명대학을 나와 일류회사에 다니고 있어서 친구들에게 부러움의 대상이었지만, 정작 남편이 먼저 갔으니 하늘이 꺼졌을 것 같은 기분이겠다는 생각이 떠나지 않았다.
여러 해가 지났어도 가깝던 동창들의 관혼상제가 생기면 그의 부인에게도 연락을 하는데, 반갑게 전화를 받고 말을 앞세워 나타난다. 친구가 마지막 투병을 하며 살던 시골집에서 혼자 살고 있다며 지나가는 말처럼 근황을 들려준다. 주말이면 자식들이 몰려와 남편처럼 든든하게 옆을 지켜준다고 하지만 역시 말끝에는 힘이 없어 보인다. 집둘레에 심었던 옥수수가 올여름에도 잘 자랐다는 말이나 장마철 개울가에서 사위가 투명으로 잡았다던 잉어 이야기까지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실타래처럼 풀어낸다. 요즈음은 근처에 있는 암자에 자주 가서 불공을 드리는 일이 가장 중요한 일과라고 하는데, 다행히도 교사생활을 오래해서 혼자 쓸 만큼은 연금이 나와 생활비는 걱정 없이 살아간다고 담담하게 웃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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Ⅱ.
살아지는 이야기
평생 일구었던 도매상을 접고 봉화로 숨어든 선배의 술잔에는 농부가 다 된 듯 어느새 구수함이 배어있다. 병풍처럼 둘러친 높은 산봉우리들이 계절의 변화를 시詩처럼 엮어내는 골짜기. 작은 폐교를 사서 여름한철 수련회관을 운영하며 아내와 농사짓고 사는 이야기를 빈 막걸리 병이 병정처럼 늘어설 때까지 떠벌린다.
“시골에서는 말이지 한 달에 20만 원이면 살아진다. 너, 그거 몰랐지?”
하룻밤 술값에도 모자랄 금액으로 한 달을 살아간다니 어이가 없다. 하지만 그는 빙그레 웃으며 말을 이어간다. 그저 노인네들만 10여 가구가 사는 마을. 허물어져가는 빈집이 더 많고, 중늙은이 그 선배가 그 마을에서는 가장 젊은이라서 읍에 나갈 심부름은 도맡아 한다며 웃는다. 아내가 건넛마을 꼬부랑 할머니 상추 뜯어가라는 성화에 못 이겨 몇 잎 따노라면 할머니는 애호박과 시금치를 검은 비닐봉지에 넣어 주신다며 시골 인심에 새삼스럽게 수다를 떤다.
봄철에 모내기하는 논에서 잔심부름해주면 일당 7만 원, 가을걷이하는 마당에 가서 고추 따주면 일단 5만 원. 그렇게 서너 번만 나가면 한 달 생활비가 나온다니 신기하다. 어쩌다가 민박 손님이 들어 생기는 돈은 막걸리 값이 되고 서울 사는 자식들이 들르면 아껴둔 쌈짓돈을 손자 손에 쥐어주는 재미가 여간 아니라며 손자 자랑으로 화제를 옮긴다.
겨울이면 노인들은 대게 자식들이 사는 대도시로 나가 적막강산이 되지만 뜨끈한 아랫목에 배 깔고 엎드려 글을 쓰다가 때때로 졸며 음악에 잠기고, 산에 올라 장작 한 짐 해서 지고 내려오면 어느새 겨울이 다 지난다고 한다.
그의 이야기를 듣고 있자니 문득 어린 시절 고향집 등잔불 밑에서 겨우내 이 잡던 생각이 났다. 보리쌀만 한 이가 등줄기를 오르내리고 솔기마다 슬어놓은 서캐를 등잔불에 대면 고기 타는 냄새가 났다. 아침이면 꽁꽁 언 우물을 깨서 세수를 해야 했고, 얇은 문풍지는 초저녁부터 구들장의 온기를 빼앗아갔었다. 이불을 두 개씩 포개서 덮고 자던 그 시절로 다시 돌아가자는 말은 도시문명에 길들여진 내게는 아무리 친한 선배가 꼬인다고 해도 따라나서기는 어렵다는 생각이 들었다. 고향의 푸른 풀밭과 낭만적인 꾀꼬리 소리가 언제나 그리워서 지난여름에 막상 며칠 쉬러 갔지만 이틀이 지나기도 전에 돌아가야겠다고 모기와 싸우며 투덜대지 않았던가.
그는 복잡한 생활이 단순해지니 얼마나 좋으냐며 자기가 사는 옆집이 비었노라고 넌지시 눈짓을 한다. 하지만 한밤중에 몸이 아프기라도 하면 어쩌란 말이냐고 물었더니 오히려 더 건강해져서 아플 일이 없다는 궤변으로 대꾸한다. 돈이 없어도 살아진다는 산골 생활이 결국 선배를 원시적인 일상으로 데리고 가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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Ⅲ. 살아내는 이야기
연말이 되어 여러 지인들에게 안부전화를 하면서 문득 제주도로 간 후배가 생각났다. 그는 명예퇴직 후에 여러 사업에 혼을 댔다가 결국 어려운 처지가 되어 한동안 소식이 없었다. 같은 직장에 다녔던 인연으로 가깝게 지낸 지 수십 년이 되었으므로 무척 궁금하던 차에 서귀포 근처의 어촌으로 내려가 펜션을 관리한다는 소문이 바람결에 들려 왔다.
적어 놓았던 전화번호로 연락을 하니 처음에는 혹시 빚쟁이는 아닐까 당황스러워하는 눈치다. 지인들의 근황으로 이야기를 시작하자 기분이 조금 풀렸는지 그동안 지낸 어려운 시절 이야기를 넋두리처럼 풀어낸다. 도대체 무슨 연고로 남쪽나라에 갔느냐고 물으니 이민 간 선배가 큰 집을 사놓고는 마땅히 관리해줄 사람이 없다고 해서 내려왔다고 한다. 펜션처럼 놀러 오는 손님을 받아 생활비를 벌고, 낚싯배를 타고 나가 세월을 낚으며 살아내고 있다고 목소리가 잠긴다. 한때는 대기업에서 출세했다는 소리를 듣던 중년남자의 활기찬 목소리는 이미 아니다.
그곳에도 젊은이는 가뭄에 콩 나듯 드물다면서 자기가 동네 성당에서는 젊은 축에 끼어 가지 직책을 도맡아 하고 있다고, 자랑이라고는 그것뿐이라며 한숨을 쉰다. 휴양지에서 빚 독촉 받지 않고 노년을 보낼 수 있으니 얼마나 행복한 인생이냐고 위로하자 친구라고는 아무도 없는 어촌에서 감옥살이처럼 살아내고 있다며 “형이 와서 한번 살아 봐!” 하고 짜증을 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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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간다. 살아진다. 살아낸다.
나는 과연 어떤 모습일까 생각해본다. 그저 아침이면 천사표 아내가 차려주는 밥상을 받고, 퇴근하면 새로 낳은 손녀 얼굴이 동화책보다 재미있다. 물안개처럼 피어오르는 작은 행복에 감사하며 오늘도 살아간다.
그러나 회사에 출근하면 아침부터 하청업체에서 돈 달라는 아우성, 해외 거래처에서 보내오는 각종 문의와 하자처리 요청까지 불황의 터널 속에서 전쟁을 치르는 기분이다. 저녁 무렵이면 그래도 하루를 살아냈다는 안도감에 술친구들에게 전화를 해댄다.
월말이 되면 쪼개고 보태서 월급을 주고, 거래처에 물품대금을 지급하고 나면 그럭저럭 한 달이 무사히 살아졌다면 안도한다. 다람쥐 쳇바퀴 속에서 돌다가 문득 거울을 보니 머리에는 어느새 흰 눈이 내려 겨울 동산처럼 되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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