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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세상/좋은수필 3

[좋은수필]사람 소리 / 함민복

사람 소리 / 함민복


 

 

눈이 내렸다. 사람 발자국을 간신히 남길 정도의 자국눈이다. 이렇게 사는게 아닌데, 눈이 와도 빗자루 들고 눈 치울 마당도 없이 살고 있다니. 참 한심한 시골살이다. 새벽 이웃집에서 눈을 치우는 비질 소리와 넉가래 미는 소리는 차고 맑게 들리지 않았던가.

그 소리가 들리면, '또 눈님이 오셨군.' 혼잣말을 하며 잠을 개켜 유리창에 올려놓던 그리운 옛집, 눈 내린 새벽 장갑과 모자를 준비하고 마당으로 나가 찬 공기부터 한 큰 숨 들이마셨다. 그러고 나서 개집 지붕을 쓸어주었다. 난데없는 사방 은세계에 어리둥절한 똥개의 눈빛, ', 길상아, 너는 햇개니까 눈을 잘 모르겠구나. 이게 눈이라는 것이다.' 세월을 조금 더 살았다고 잘난 척을 하며 눈을 가르쳐 주었었지. 그러다가 집 뒤 수백 년 묵은 느티나무를 향해 죄송하다고 고개 숙였지. 이웃집과 밭두렁으로 연결된 길을 내며 사람살이와 사람살이가 길로 연결되어 있음을 절감하고 그 기회를 준 눈에게 감사도 했었지. 첫눈을 쓸다가 그래도 첫눈인데 하는 미안한 맘이 들어 빗자루질을 멈추고 빗자루 글씨로 '첫 눈 환영'이라고 내린 눈 위에 써놓고 눈치우기를 끝내기도 했었지.

나는 지금 눈 칠 몽당 싸리 빗자루 한 자루 없다. 집을 얻어 살다가 방을 얻어 이사를 하며 살림살이를 처분했기 때문이다. 이사를 하고 짐을 푼 저녁, 나는 아차 싶어졌다. 옆방 사람들 떠드는 소리가 고스란히 들려왔다. 이 일을 어쩐담.사전에 두 번씩이나 집을 와서 봤거늘 왜 사람 목소리를 의식하지 못했을까.

내가 집을 보러왔던 한낮, 옆집 사람들은 일터에 나갔었나 보다. 낭패감이 들었고 그때서야 벽을 톡톡 두드려보니, 아뿔사! 벽은 샌드위치 패널 한 장으로 되어 있는 게 아닌가. 옆방 사람들 소리가 들리는 것은 상관없다 해도, 옆방 사람들이 들을 내 소리들은 어쩔 것인가. 나는 대개 아홉시 뉴스를 듣다가 잠이 드는데 라디오를 켜놓고 잠이 들기 일쑤다. 거기다가 글을 씁네 하고 두세 시면 일어나 자판을 두드리기도 한다. 옆방 사람들이 얼마나 괴로워할까. 80년대 초 습작시절 친구 방에서 타자기를 두드리다 주인집 할머니한테 간첩으로 오인 받았던 일까지 떠오르며 걱정을 배가 시켰다.

옆방 사람들은 생각보다 조용했다. 세탁기 돌리는 소리와 상대편이 잘못 알아듣는지 답답해하며 언성을 높여 전화 통화를 할 때만 신경이 약간 쓰일 뿐, 나도 신경을 썼다. 가급적 한밤중에는 변기 물을 안 내렸다. 부득이 물을 내렸을 때는, 쓸려가고 차오르는 물소리가 멎은 다음에 화장실 문을 열었다. 또 한밤중에 컴퓨터 사용을 자제했고 집을 비울 땐 전화기 벨소리를 묵음으로 해 놓았다.

그렇게 조심조심 살던 어느 날이었다. 집에 놀러온, 내가 살던 옛 동네 동생에게 목소리를 낮추라고 했을 때 그가 던진 말 한마디가 나를 후려쳤다. "괜찮시다. 다 사람 살아가는 소리 아니꺄. 사람소리인데, 뭘 그러시꺄." 사람 살아가는 소리, 사람 소리라. 그 말은 쪼잔한 내 맘보를 흔들어 놓기에 충분했다. 나는 옆방에 아이가 없어서 스끄럽지 않은 게 다행이라고 여겼다. 싸움하지 않는 이웃을 만나 축복받았다고 호들갑을 떨었었다. 이 얼마나 좀팽이 같은 심사인가. 아이 우는 소리, 싸우는 소리 다 사람 살아가는 소리라고 생각하면 못 받아들이고 못 껴안을게 뭐 있겠는가.

한밤 혼자 산 고개를 넘고 있었다. 머리카락이 쭈뼛쭈뼛 서 담배를 한 대 꺼내 물었다. 그때 멀리서 개 짖는 소리가 들려왔다. 근처에 사람이 살고 있음을 증명하는 소리를 듣자 맘이 즉시 안도되었다. 나는 고개를 넘는 내내 개가 오래, 더 크게 짖어주기를 바라며 라이타 불꽃을 간간이 튀겼다. 그날 나는 개 짖는 소리를 통해 사람 살아가는 소리를 들었던 것이다.

오늘 나는 철물점에 가자 플라스틱 빗자루라도 한 자루 사놓자. 그리고 눈이 오면 어디 아무 데나 가서 길을 쓸자. 사람이 살아가는 길을 쓸면 사람 살아가는 소리가 나리라. 사람 살아가는 소리를 내자. 사람소리를 내자. 그 소리는 눈의 고요, 눈의 침묵에게도 용서받을 수 있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