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 / 곽흥렬
이제 며칠만 있으면 다시 할아버지의 기일이다. 손을 꼽으며 어림셈을 해보니 이번으로 벌써 스무 해째가 넘는다.
세월이 이만큼이나 흘렀건만, 당신께서 돌아가시던 때의 기억은 어제 일처럼 생생하다. 여든 중반 어름에까지 이른 연세였으니, 당시의 평균수명으로 따져서는 호상이라 일러도 관계찮으리라. 사위가 칠흑 같은 어둠에 싸인 한밤중, 마당 가운데 피워 놓은 모닥불이 지향 없이 일렁이고 온 마을 사람들은 그 불빛을 가로질러 부산스레 오갔다. 그런 왁자그르르한 분위기가 마치 한마당 축제를 벌이는 것 같은 광경을 연출했었다.
기억 속의 풍경은 세월이 흐를수록 또렷해져 가건만, 세상의 모습은 그새 많이도 변해 버렸다. 제삿날이면 대청마루를 그득히 채웠던 그 많은 제관들이 하나 둘 뿔뿔이 흩어지고, 남은 사람은 이제 아버지와 나 이렇게 달랑 둘뿐이다. 불효막심한 소리 같지만, 머잖아 아버지마저 세상을 뜨시고 나면 누가 잔을 치고 헌주를 하며 축문을 읽을 것인가. 떠들썩하던 잔칫집 분위기 대신, 깊은 산중의 절집 같은 적막감만이, 타오르는 향불 연기에 뒤섞이며 감돈다.
제삿날이 다가오면 아내는 미리부터 잔뜩 긴장의 끈을 조이기 시작한다. 남자들이야 차려진 상머리에다 대고 꾸벅 꾸벅 절 두어 번 하는 것으로 대개 소임이 끝나지만, 이것저것 잔손질 많이 가는 그 번다한 일이 주부들에겐 얼마나 마음의 부담지수를 높이는가. 그러다 보니, 살짝만 건드려도 터져 버릴 것 같은 풍선처럼 아내의 신경 줄은 팽팽해진다.
하기야 신경이 예민해지는 건 아내뿐이 아니다. 은근한 걱정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기는 나 역시 마찬가지다. ‘이번엔 제관이 얼마나 될라나’, 이런 되지도 않을 걱정이라면 어폐가 있을까. 혼자서 북 치고 장구 치고 해야 할 판이니 울울해서 하는 푸념이다.
궁여지책으로, 자정을 넘겨 봉행하던 참사(參祀) 시간을 파젯날 초저녁 무렵으로 바꾼 지도 하마 오래다. 생업에 쫓기는 현대인들에게 농경시대나 어울렸을 법한 문화를 무작정 지켜 주기를 바란다는 건 이제 더 이상 이치에 맞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게 배려를 하는데도 제관 수는 가물에 웅덩이 물 잦아들 듯 한 해가 다르게 줄어만 간다.
어디 제사뿐이랴. 요즈음은 묘사 같은 시제에도 도무지 사람이 모이질 않는다. 집안의 어른들은 공휴일로 향사 날을 바꾸자는 젊은 사람들의 간곡한 청원을 일언지하에 거절해 버린다. 오랜 세월 탈 없이 지켜 오던 풍습을 하루아침에 갈아치울 수 없다는 것이 그분들의 논리다. 그 완강한 고집을 누가 무슨 재주로 꺾을 것인가.
하지만 큰 물줄기는 막을 수가 없는 법, 그러니 이것도 다 한때일 뿐이다. 장차 아버지 세대가 가고 나면 그렇게 하지 말래도 저절로 바뀌고 말 터이니까. 그렇다면 부질없이 동동거리기보다는 내처 기다리기로 하는 편이 오히려 현명한지도 모르겠다.
대가족 문화에서 핵가족 문화로 시대가 바뀌면서, 지난날의 그 흥성했던 축제 분위기는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가 없다. 설날 아침이면 우르르 떼 지어 몰려다니며 집안의 어른들을 찾아 세배를 드리고, 묘사 철이 되면 조상님의 산소 앞에 끝이 보이지 않을 만큼 죽 일렬로 횡대를 이루어 늘어서던 장관, 그 따뜻하고도 정겨운 광경은 이제 추억 속의 이야기가 되어 버렸다. 그런 흘러간 장면들을 더듬고 있노라면 가슴에 시린 바람이 인다.
그러나 어쩌랴. 세월 따라 형편 따라 변하고 달라지는 것이 우리네 사람살이인 것을……. 시대가 바뀌면 의식도 바뀌고, 의식이 바뀌면 풍습도 달라지는 것은 지극히 자연한 세상사의 이치 아닌가. 이런 생각을 하며 마음을 고쳐먹는다.
이번 제사에는, 제관이 적더라도 너무 그리 애태우지 아니할 수 있을 것 같은 예감이 든다. 할아버지 뵐 면목이 없지 않을 성도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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