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원사 가는길 / 정찬주
비가 염불소리처럼 원왕생 원왕생 내리고 있다. 이런 날 나는 내 산중 처소와 이웃인 쌍봉사에서 대원사까지 다녀오기를 좋아한다. 대원사까지는 그리 먼 거리가 아니다. 좁은 지방국도의 제한속도를 지키더라도 40여분밖에 걸리지 않는다. 길을 달리는 동안 문득 40여분의 거리로 축약한 내 인생 길이란 느낌이 든다. 아버지가 외지로 가게 되어 불과 100일 밖에 살지 못했지만 가는 길에 만나는 바람재마을에는 나의 태가 묻혀 있고, 대원사에서는 생사生死를 명상하곤 하기 때문이다.
요즘의 쌍봉사는 예전과 달리 세상에 많이 알려져 있다. 전국에서 찾아오는 이들이 부쩍 늘었다. 내 처소를 찾아오는 손님들은 "왜 쌍봉사 근처에 집을 짓고 삽니까?"하고 묻는다
내 젊은 날의 방황을 한마디하지 않을 수 없다. 대학시절 처음으로 찾은 1970년대 초만 해도 쌍봉사는 폐사에 가까웠다. 수백년된 고목의 낙엽들이 삼층목탑 주위와 극락전 마당에서 바람에 뒹굴고 있을 뿐, 절은 을씨년스럽기만 했다.
그때 나는 피난민 행색이었다. 요사에는 덮고 잘 이불이 없어 모포를 등에 지고 10리 길을 걸어와야 했다. 대학교정에는 군인들이 점령군처럼 진주해 있었고, 나는 서울을 떠나 숙식이 해결되는 절에 피신해 있어야 했던 것이다. 교정에서 얼씬거린다는 것은 괴로운 일이었다. 민주를 외치며 데모하는 것도 휩쓸리기를 싫어하는 내 성격 탓에 차츰 흥미를 잃었고, 그렇다고 히죽거리며 교정 잔디밭에서 하숙집 아주머니가 싸준 도시락을 까먹는 일도 그 시대에는 염치없는 짓거리였던 것이다.
쌍봉사는 나에게 적막과 친해지는 법을 가르쳤고, 끓는 분노와 열뇌熱惱를 식혀주었다. 흙탕물이 맑은 물과 흙으로 분리되듯 비로소 나는 본래의 나로 돌아올 수 있었다. 절에는 단 세 사람밖에 없었다. 개를 잡는 남편의 업을 씻기 위해 들어온 공양주보살과 몸뚱어리가 뜨거운 나와, 출타가 빈번한 주지스님이 전부였다.
주지스님마저 절을 비우고 나면 나는 고독을 이기는 방편으로 빗자루와 걸레를 들고 절 마당을 쓸고 법당을 닦았다. 어느 날인가는 삼층목탑 안의 불단에 올라가 부처의 손바닥과 어깨에 켜켜이 쌓인 먼지를 닦기도 했다. 그러자 부처가 내게 미소를 보냈다. 교과서에서 말하는 미소가 아니었다. 나를 전율케 한 미소였다. 쌍봉사 부처는 내게 말했다. 늘 미소지을 수 있는 이가 바로 부처라고. 그 후 쌍봉사 부처는 내 인생의 큰 스승이 되었다.
쌍봉사 뒷길을 지나 화순군과 보성군의 경계인 큰 고개를 하나 넘으면 내가 태어난 바람재 마을이 보인다. 멀리 수백년 된 느티나무 한 그루도 보인다. 바로 저 고목 아래 집에서 나는 세상에 으앙 하고 울면서 태어났고 사람들은 아들 낳았다고 손뼉치며 기뻐했던 것이다.
어느새 나는 보성군 복내면 소재지에서 문덕면에 이르는 길을 달리고 있다. 벚꽃이 져버리고 그 환영만 남은 길이지만 무성해진 나뭇잎은 내 가슴까지 젊게 물들인다. 여린 잎이 나무의 영혼이라면 지금의 잎은 살겠다고 아우성치는 독이 잔뜩 오른 생명에의 의지다.
저 독하게 푸른 잎을 보고 아무리 삶에 지쳐 있다 해도 힘을 내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을까. 나는 대원사로 가는 이 길을 삶의 상처가 깊은 이에게만 보여 주고 싶다. 차가 깊은 맛과 그윽한 향을 내는 것은 차를 만드는 과정에서 찻잎에 상처를 내주기 때문이다. 사람도 마찬가지다. 누군가가 이 길을 가면서 주먹을 쥐고 눈물을 흘린다 해도 이상한 일이 아니다.
대원사 초입부터는 무성한 벚나무 잎의 장막으로 반광반음半光半陰의 길이 된다. 구불구불한 산길은 자궁으로 이어지는 탯줄 같고 중음中陰의 공간 같다. 그도 그럴 것이 대원사는 모든 생명의 극락왕생을 염원하는 극라건을 중심 법당으로 삼고 있고, 여느 사찰과 달리 외로운 넋을 달래주는 지장기도를 많이 하는 절이다. 더욱이 신라 왕자 출신으로 신라 차씨를 가지고 중국에 가 지장왕보살로서 존경받고 다불茶佛이 된 김지장 스님을 모시는 김지장전金地藏殿도 있다.
지금 대원사는 다가오는 초파일을 맞이하여 연꽃 축제중이다. 단순히 눈을 즐기기 위한 행사가 아니다. 연꽃의 청정함과 향기에 취해 욕심을 놓아버리자는 수행 과정이다. 극락極樂이란 단어는 지극히 편안하다는 말이다. 절에서 키운 108가지 연꽃을 보는 동안 108번뇌가 사라진다면 그 순간이 바로 극락이 아닐 것인가.
마침내 대원사에 이르러 빗발을 피해 찻집 처마 밑에서 건너편을 바라보니 금언이 적힌 노란 깃발 하나가 눈에 든다. '잘 보낸 하루, 달콤한 잠/ 잘 보낸 인생, 행복한 죽음.'
그렇다. 하루를 잘 보내면 달콤한 잠을 이루고, 인생을 잘 보낸 이는 행복한 죽음을 맞이할 수 있을 것이다. 극락전에 언뜻 보이는 연지문蓮池門에 들어서니 반갑게 안겨오는 연꽃 향기에 시름이 절로 놓이고 나무아미타불을 외는 창불唱佛소리에 마음이 평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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