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시 천사 / 김아가다
병원 진료실 앞이다. 오십 대 중반의 여인이 금방이라도 숨이 넘어갈 것처럼 자지러지게 기침을 한다. 얼굴까지 벌겋게 부어올라 헉헉거린다. 물 한 모금을 내밀고 천천히 등을 쓰다듬어 주자 겨우 진정이 되는 눈치다. 온몸이 물에 젖은 솜이다. 식은땀을 닦으면서 고맙다고 몸을 굽힌다. 여인은 눈물을 흘리며 갈라진 목소리로 나에게 말을 건넨다.
“고맙습니다. 천사입니다.”
천사? 내가 천사라니! 그 말을 듣고 난 후 하루가 온통 불편했다. 생각조차 하기 싫은 지난날의 기억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지금도 그때를 생각하면 손바닥에 땀이 배어난다.
시골 친정을 다녀오는 길이었다. 어둑한 도로에 검은 물체가 나동그라져 있는 것이 아닌가. 차에서 내려 보니 피투성이가 된 남자가 몸부림을 치고 있었다. 머리 쪽에서 피가 흘러 바닥이 흥건했다. 늦은 밤이라 도로에는 아무도 없었다. 뺑소니 사고였다. 끔찍했다. 무의식중에도 인적을 알아챈 걸까. 남자의 손이 희미하게 나를 향해 손짓하는 것 같았다.
흠칫 겁에 질려 뒷걸음질 쳤다. 살아있다! 차에 태워서 병원에 데리고 가야 하지 않을까? 피투성이가 된 남자를 나 혼자서 어떻게? 119에 신고를 해야 하나? 혹여 내가 뒤집어쓸 수 있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찰나의 선택은 그를 외면한 채 차에 오르고 말았다. 누군가 뒤를 잡아당기는 것 같아서 반사적으로 엑스레이터를 힘껏 밟았다. 집으로 오는 내내 머릿속이 혼란스럽고 가슴이 벌렁거렸다. 그 일이 있고 난 뒤로 종종 가위에 눌려 소스라치듯 잠을 깨기도 했다.
천사라는 그 말에 지난 일이 생각나서 괴로워하던 참인데 이번 주일의 복음 말씀이 착한 사마리아인의 이야기였다. 어떤 사람이 강도에게 가진 것을 모두 빼앗기고 두들겨 맞아서 반쯤 죽어 있었다. 마침 그 앞을 지나가던 사람이 그를 보고는 모른 척 지나갔다. 또 다른 한 사람도 멀리서부터 그를 피해지나가 버렸다. 그런데 뜻밖에도 이방인이었던 사마리아 사람이 그의 상처에 기름과 포도주를 붓고 싸매어 돌보아주었다.
나는 어떤 사람일까? 죽어가는 사람을 두고 겁에 질려 도망치는 비열한 인간이었다. 꿈틀거리며 사력을 다해 자신의 생존을 알리려 했던 사람. 그 남자의 실낱같은 목숨은 나의 손에 달리지 않았을까? 그는 지금 살아있을까, 죽었을까. 오랜 세월 무거운 쇠사슬이 나의 머리와 가슴을 옥죄었다. 지금도 길가 전봇대에 뺑소니 사고를 목격한 사람이 있으면 연락을 해 달라는 현수막을 보면 뒷골이 당긴다. 목격자는 아니지만 그를 피해 달아난 내 양심의 본성이 자꾸 서성이기 때문이다.
중국의 맹자는 사람의 본성은 원래 선한데 악하게 보이는 것은 선한 것을 상실했기 때문이라고 했다. 또한 순자는 사람의 본성은 원래 악한 것이며, 선한 것이야말로 인위적으로 교정된 것이라고 주장했다. 예쁜 꽃을 보면 꺾어서 가지고 싶고 예쁜 아기를 보면 볼을 꼬집어 주고 싶은 것도 본성의 악함 때문일까.
사람은 누구나 자기중심적이며, 이해관계가 없는 일에 뛰어들고 싶어 하지 않는다. 그러나 가진 것 없는 허약한 사람이 자기보다 더 약한 사람을 배려하고 온정을 베푸는 것은 우리 속에 분명 착한 마음이 있기 때문이 아닐까? 누구라도 ‘잠시 천사’는 될 수 있다는 뜻이다. 피투성이 남자에 대한 나의 비열함은 타고난 나의 본성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기침하는 여인에 대한 보살핌 또한 나의 일부가 아니겠는가. 선과 악, 두 얼굴을 가진 야누스가 바로 내 모습인지도 모르겠다.
“천사입니다.”
이 한 마디는 비겁한 앙금으로 뭉쳐진 나의 본성을 뒤흔들어 놓았다. 오히려 그녀가 내게 천사였다. 가슴을 짓누르는 지난날의 혼돈이 한쪽 구석에서 파문을 일으키고 잇사. 나는 빌었다. 아무쪼록 그날 밤 그에게 착한 사마리아 사람이 나타났기를. 또한, 나도 이제 ‘잠시 천사’가 아닌 ‘자주 천사’가 될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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