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경 속으로 / 정경해
전국적으로 일시에 내렸다는 폭설이다. 차창 밖은 온통 눈꽃천지였다. 십 수 년 만에 내렸다는 눈은 바라볼수록 부셨다. 수북이 쌓인 눈을 헤치고 바퀴자국이 또렷했다. 눈앞으로 난 두 줄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그 평행선은 시선 저 먼 곳까지 길게 이어졌다. 커브에서 착 꼬부라진 모습조차 아름다웠다.
앞서 간 차는 폭설 속에서도 꼬불거리는 길을 용케 잘 찾아갔다. 그래서일까. 내가 탄 고속버스는 꼭 그래야만 하는 것처럼 그 길을 따라 갔다. 그조차 마음을 일렁이게 했다. 버스 기사는 운전대를 잡은 채 바짝 긴장을 하고 있겠지만 승객인 나는 듬뿍 받은 축복인양 설렜다. 감탄사가 저절로 나왔다. 나도 모르게 몸을 반쯤 일으켰다.
행사장소인 유스호스텔에 가까워질수록 조급했다. 화려한 눈꽃송이를 그냥 스치고 마는 것이 아쉬웠다. 마음으로 담는 것도 의미가 있겠지만 카메라에 담아 두고두고 꺼내보고 싶었다. 하지만 사진 찍고 싶은 마음은 애써 눌렀다. 버스 기사가 핸들을 조심스럽게 움직이는 모습을 보며 그런 생각을 한 것조차 미안했다. 다른 사람들도 같은 마음인지 묵묵히 차창 밖으로 눈길을 보냈다.
나의 마음은 끊임없이 흔들렸다. 앙상한 나뭇가지의 결을 따라 소복하게 쌓인 눈이 나를 끌어당겼다. 애써 다독이던 마음을 뒤흔들었다. 나는 손에 꼭 쥐고 있던 휴대전화를 다시 열었다. 더 망설일 수 없을 만큼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곳을 지날 때 셔터를 눌렀다. 폰의 찰칵 소리가 생각보다 컸다. 나는 도둑질하다가 들킨 사람처럼 고개를 푹 숙이며 몸을 낮췄다.
휴대전화에 찍힌 사진을 조심스럽게 재생하다가 깜짝 놀랐다. 한껏 기대를 한 나의 마음과는 달리 찍힌 사진은 안개 속처럼 뿌옇다. 피사체를 잘 잡는 스마트폰의 특성을 알기에 의아했다. 내가 사진을 잘못 찍었나 싶어 다시 셔터를 눌렀다. 하지만 연거푸 찍어대도 사진은 여전히 안개 속이다. 마치 안개에 묻힌 강가의 모습을 수묵화로 보는 것 같다.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사진이 뿌옇게 보이는 것은 뭔가 다른 이유가 있을 것 같았다. 사진을 찍는 기술이 잘못된 것은 아니라는 확신이 들었다. 곰곰이 그 이유를 생각하다가 휴대전화를 살피던 눈을 들어 차창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차창이 온통 뿌옇다. 빈틈이 없을 정도로 먼지투성이다. 사진이 뿌옇게 나온 것은 차창에 낀 먼지 때문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차창의 안쪽은 김이 서릴 때마다 닦아서 깨끗하다. 하지만 차창 바깥쪽은 쏟아져 내리는 눈발로 인하여 몹시 지저분했다. 더러워진 차창을 닦기 전에는 아름다운 풍경을 제대로 담을 수 없다. 하지만 달리는 버스를 내 마음대로 할 수 없었다. 마음만 동동거리자니 이즈음의 내 모습이 떠오른다.
요즘 나는 힘겨운 생활을 하고 있다. 튼실하던 몸에 이상이 생겼다. 시도 때도 없이 몸에 열기가 느껴지고 얼굴도 달아오른다. 산후에 시어머님이 끓여주신 뜨끈한 미역국 한 양푼 먹고 났을 때처럼 온 몸이 땀으로 흥건하다. 매서운 한파가 활개를 치는 길거리에서조차 얼굴이 땀으로 축축하다. 사람들은 피부에 윤기가 흐른다고 부러워하지만 나는 견뎌내기가 쉽지 않다.
아무거나 잘 보이던 눈에도 이상이 왔다. 글씨나 물건이 두 겹, 세 겹으로 겹쳐보였다. 뿐만 아니라 이제는 마음의 눈에도 변화가 왔다. 뿌연 막을 하나 씌웠다. 그 무엇도 제대로 보려들지 않았다. 평소에는 예쁜 사람, 괜찮던 사람인데도 미운 구석이 자꾸 보였다. 서로 잘 지내던 사람임에도 전에 없이 거슬렸다. 그런 사람에게는 은근히 꼬투리까지 잡았다.
무엇인가 마음같이 잘 되지 않을 때에는 울근불근했다. 돌아서서 후회를 하면서도 그런 마음을 멈출 수가 없었다. 더 무서운 것은 그것을 합리화시키는 나 자신이었다. 언제부터인가 갱년기를 이유로 내세우며 그런 것들을 당연시하였다. 두 해째 감기몸살을 달고 사는 것도 다 그 때문이라고 했다. 온몸을 감돌고 있는 열꽃도, 마음속의 공허도 다 그것 때문이라며 아등바등했다.
나의 변화에 누구보다 먼저 남편이 반응했다. 남편은 안타까워하며 운동을 권유했다. 땀을 흘리며 뛰라고 했다. 내가 힘겨워하는 증상들은 헉헉거리며 뛰다보면 완화될 수 있다고 말했다. 나는 오히려 반발했다. 그 흔한 보약 한 재 지어주지 않는다고 투덜거렸다. 힘겨워하며 상심하는 나를 조금도 배려해주지 않는다며 화를 냈다. 남편이 나에게 힘을 주려고 애를 써도 받아들이지 않았다.
나는 나에게 일어나는 증상을 완화시키려고 노력하지 않았다. 한술 더 떠서 몸과 마음에 나타나는 변화를 그대로 느껴보겠다고 고집을 부렸다. 몸이든 마음이든 추스를 수 있는 힘이 나에게 있어서 이겨내기를 바랐지만 그렇지 못했다. 몸과 마음이 분리되는 것 같았다. 나는 당황했고 많이 혼란스러웠다. 나도, 가족도 지쳐갔다. 더 이상은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음이 먼저 손을 내밀었다.
돈을 주고 살 수 있는 것은 많다. 하지만 아무리 큰돈을 주고도 살 수 없는 것이 청춘이고 세월 아닌가. 건강했던 소싯적으로 되돌아갈 수는 없는 일. 이미 진행된 생리적 현상도 어쩔 수 없는 일 아니던가. 그대로 받아들일 수밖에.
달리는 버스를 세울 수다 없는 나는 미련 없이 휴대전화를 접었다. 몸을 의자 깊숙이 밀어 넣고 차창 밖으로 눈을 돌렸다. 풍경을 렌즈에 담고 싶다는 조급한 마음이 수그러들고 나니 오히려 편안했다.
버스 차창으로 스치는 산과 들은 끊임없이 피어나는 눈꽃으로 넘쳐 난다. 버스로 세 시간을 달렸어도 변함이 없다. 아름다운 눈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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