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 / 노혜숙
나는 원래 한 개 둥근 세포였다. 그때 어머니의 둥근 아기집은 얼마나 포근하고 아늑했을 것인가. 열 달 동안 안락한 유영을 누리다 나온 세상 역시 둥글었다. 우리가 몸담고 사는 지구며 이웃해 있는 행성들 그리고 나무에 매달린 열매까지 대부분 구체였다. 그뿐인가. 사람의 얼굴을 묘사할 때도 일단 둥글게 그리고 보았다. 이 모든 게 그저 우연일까.
30개월 된 아기들을 대상으로 실험을 했다. 동그라미와 네모 중 어떤 형태를 더 잘 기억하는가 하는 것이었다. 실험에 참가한 아기들은 하나같이 둥근 모양은 기억했으나 네모난 것은 기억하지 못했다. 인간은 선천적으로 자기 얼굴을 닮은 형태를 좋아하며 둥근 모양과 곡선을 더 선호한다는 사실을 입증한 실험이었다.
둥근 모양 가운데 우리의 신명을 돋우는 사물이 있다. 공이다. 공은 끊임없이 움직인다. 어디로 튈지 모른다. 그 예측불허의 긴장감 때문에 사람들은 공으로부터 시선을 떼지 못한다. 공의 방향에 따라 순간순간 승패가 엇갈리고 사람들의 희비도 춤을 춘다. 보통 때의 감성지수는 6정도인데 , 공을 좇는 사람들의 뇌파에선 14.6이라는 극도의 희열상태를 알려주는 흥분지수가 측정된다고 한다. 사람들이 최대한 공의 움직임을 잘 볼 수 있는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비싼 돈을 지불하고 밤샘 수고를 아끼지 않는 것도 그 때문이리라.
오죽하면 공에 신의 지위를 부여했을까. 일본 시라미네에는 공의 신들을 모신 신사가 있다고 한다. 특별한 의미가 있는 '공신'들을 전시해 놓고 구기 종목의 선전을 비는 의식을 치르는 곳이다. 선수들은 공의 신 앞에 허리를 구부리고 승리를 염원하는 기도를 올린다. '공신'의 사랑을 받고 부와 명예와 권력을 소유하게 되기를 꿈꾸는 것이리라. 공은 단순한 놀이도구가 아니라 강력한 욕망의 도구이기도 하다.
우리나라 화폐 단위를 가리키는 말 역시 둥글 원圓이다. 이 원은 인간을 사로잡는 사물 가운데 으뜸이 아닐까 싶다. 우리 속담에 "돈만 있으면 개도 멍첨지."라는 말이 있다. 아무리 천한 사람이라도 돈만 있으면 남들이 높이 대접해 준다는 말이다.
우리는 지금 속담이 구체적 일상이 된 현실에 살고 있다. 성형 중독에 끝없는 스펙 쌓기, 고매하신 정치인들의 불법거래나 엽기적 살인, 막장드라마에 남편이 쥐꼬리 용돈을 쪼개 로또복권을 사는 것 모두 '원'이 가져다주는 마법의 힘을 소유하기 위함 아니겠는가. 상하를 구별하고 귀천을 나누는 '원'은 유일신의 권력을 가진 힘의 도구다. '자본주의를 종교가 사라진 자리에 유일하게 남아 있는 신흥종교'로 지적한 것도 무리는 아니다.
반대로 물신은 인간의 행복에 전혀 관심이 없다. 녹이 스스로를 먹어치우듯 물신은 자기를 추종하는 신도들이 통제되지 않는 탐욕으로 파멸되게 하는 속성을 지니고 있다. 물신의 위력이 기형적으로 팽창하고 부흥할수록 세상의 어둠은 짙어진다. 지금 세상은 한 치 앞 분간이 어려운 어둠 속에 있다. 그러나 어둠이 깊을수록 볕은 빛난다던가. 누군가는 이 칠흑의 어둠 속에서 명료하게 빛나는 별을 보고 나아갈 방향을 찾지 않으랴. 그들은 끝내 '원'이라는 유일신에게 영혼을 팔지 않고 용감하게 자기를 지켜낼 것이다.
원만하다 할 때의 원도 같은 둥글 원圓 자다. '모자람 없이 온전하다.'는 뜻을 담고 있다. 모나거나 거칠지 않고 서글서글한 사람을 가리킬 때 흔히 쓰인다. 모난 데가 없으니 정 맞을 일이 별로 없다. 그런 사람 주변에는 친구가 많다. 무엇보다 본인 자신이 평화로운 삶을 누린다. 옛 선현들은 조화를 관계 속에 살아가는 존재로서 갖춰야 할 덕목으로 꼽았다. 둥글다는 말에는 넓이와 깊이가 함축되어 있다. '둥글 원'이 바로 이것과 저것을 아울러 조화를 이룬 온전함을 상징한다면 과언일까.
하나의 둥근 세포로 출발한 인간은 성장하면서 자기의 모양을 만들어 간다. 평생 자기가 추구하는 모양을 만들다 결굴 생성될 당시의 점, 한 개의 먼지로 돌아간다. 자신을 둥글게 가꾸고 다듬는 것은 어쩌면 생존본능인지 모른다. 생명이든 공이든 돈이든 성품이든 거칠고 모나면 오래 존속할 수 없기 때문이다. 사람이 어릴 적부터 둥근 것에 시선이 오래 머물고 호감을 보이는 이유가 거기 있을까. 그래, 나와 '원'과 우주의 원리는 아주 오래전부터 각별한 내연관계였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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